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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원 사람들/회원

[석학부부가 사는 이야기] 연구 30년 해보니 "점점 더 재밌어"

과기한림원 2015. 2. 25. 13:17

 

[석학부부가 사는 이야기③]
김장주 공학부 정회원 (서울대 교수), 이공주 의약학부 정회원 (이화여대 교수)
연구 성과 원동력은 '혼자 한계 넘어본 경험'
'연구에선 거리두기'가 부부애 비법
과학계든 사회든 '보이지 않는 가치' 인정해줘야

 

 

 

한 사람은 전북 임실의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산골짜기였지만 박사들을 많이 배출해 일명 ‘박사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그는 교직에 계신 부친을 따라 익산과 전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방학 때 임실 본가에 다녀오면 성적이 쑥 오르곤 했다. 시골마을에 학원이나 족집게 과외선생님이 있을 리는 없고, 조용한 곳에서 혼자 공부하니 오히려 효과가 좋았거나 어쩌면 정말 노령산맥의 정기(精氣) 덕일지도 몰랐다. 수험생 때도 매일 7시간 이상 잠을 잘 만큼 ‘적당히’ 공부했는데도 당시 인기학과였던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다른 한 사람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교사였던 부친을 따라 강원도 영월, 삼척, 전라도 광주 등을 다니다 12살 때부터 서울에 살았다.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 집안 분위기 덕에 십대 중반까지는 신나게 놀았는데, 어느 날 또래들이 시험공부를 하는 걸 보고 스스로 책상에 앉기 시작했다. 공부를 할수록 화학에 큰 흥미를 느꼈으나 대학 진학을 앞두고는 부친이 권유한 ‘굶을 걱정 없는 약대’를 선택했다.

 

동갑내기였던 두 사람은 1976년 서울 종로에서 지인들 무리에 섞여 처음으로 만났다. 그리고 그 날 우연히 가는 방향이 같아 종로에서 서울역까지 둘이 걸어가게 됐는데, 그 날 이후로 두 사람의 길은 결코 나뉘지 않았고 40년 가까이 함께 걷게 되었다. 김장주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와 이공주 이화여대 약학과 교수 부부의 이야기다.

 

열정 넘치는 동갑내기 과학도였던 두 사람은 분야는 다르되 유사한 흐름과 속도로 성장해 현재 각자 분야의 석학이 되었다.

 

성적에 따라 화학공학과를 갔던 김장주 교수는 거시적인 화공보다 섬세하고 정밀한 재료공학에 큰 재미를 느껴 박사 학위 시 전공을 바꿨고, 유기전자공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엔 학계의 한계 추정치를 뛰어넘는 고효율․고성능 OLED(Organic Light Emitting Diodes:유기발광다이오드) 소자를 개발해 관련 연구기관과 기업들에서 많은 러브콜을 받고 있다. 자체발광형 유기물질인 OLED는 유연성, 투명성, 친환경성, 에너지효율성 등을 갖춰 차세대 디스플레이 소재로 손꼽히고 있으며, 그만큼 전세계적으로 관련 연구개발 경쟁이 치열하다.

 

‘화학을 좋아하는 약대생’ 이공주 교수는 결국 외연을 넓혀 대학원 때부터 생명, 미생물, 화학 등이 결합된 생화학을 전공, 프로테오믹스(proteomics:단백질체 분석기술)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가 됐다. 그는 암 전이와 스트레스 반응, 혈관신생에 관여하는 단백질의 기능과 작용기전을 규명해 약물 후보물질을 개발하고 암전이과정에서 새로운 활성산소신호전달체계를 발견했다. 또 그의 ‘즐거운 취미생활’인 여성과학기술인 네트워크 구축 분야에서도 리더십을 인정받아 아시아 최초로 세계여성과학기술인네트워크(INWES)의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입을 모아 “30년을 넘은 지금, 연구가 제일 재밌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부부를 이화여대 이공주 교수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가족의 탄생…“우리 둘 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당연한 일”

 

 

“저는 항상 제 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은 그 부분을 잘 이해해줬죠. 오히려 본인은 부인이 하루 종일 집에서 자기만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숨이 막힐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었어요. 사실 저희 세대에서 그런 가치관을 가진 남자들은 많지 않았는데 말이죠. 학생들에게 항상 이야기해요. ‘남자들 외모와 경제력 소용없어. 네가 똑똑하다는 걸 인정해주고 지원해주는 게 제일 중요해.’라고요. 남자들은 대부분 능력에 따라 기회가 주어지지만 여자들은 환경의 영향도 매우 크더라고요. 가족들의 인정과 배려가 성공을 위한 첫 단추에요.”

 

연애가 한창일 때 KAIST로 대학원 진학을 하겠다며 이 교수가 혼자 방학 내내 도서관에서 두꺼운 미생물, 생화학 책과 씨름하고 있어도 김 교수는 묵묵히 기다려줬고,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시기에 이 교수가 대학원 졸업 후 1년 먼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도 응원해줬다. 5년간의 연애기간에도, 이후 35년의 결혼생활 중에도 김장주 교수는 단 한 번도 이 교수에게 “그만두라”는 의미의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 교수는 스스로를 “복 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아마 저에게 너무 소홀히 하거나 아이들 교육에 어려움이 생기거나 또는 가정과 학교의 일에 너무 힘들어 했으면 저도 그만두라는 말을 했을지 모르죠. 하지만 바쁜 와중에서도 아이들 아침 저녁 꼬박꼬박 챙겨주었고, 이 사람이 어떻게 하였는지 아이들도 건실하게 잘 컸습니다. 그러면서도 강의와 연구를 잘 잘 한다고 하니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반면에 저는 이 사람에게 특별하게 해 준 것이 없으니 복 받은 거죠. 한마디로 결혼 대박을 터트린 것입니다.”

 

 

아내의 위기…“여성과학기술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다른 기준이 있었다”
       

1년 먼저 떠나 미국유학의 팍팍함과 외로움을 느낀 이공주 교수는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 후 국비유학생에 선발된 김장주 교수와 함께 스탠포드대학교(Stanford University)로 떠났다.

 

1985년 3월, 유학 중 낳는 첫 아이는 부부가 함께 키웠다. 유학생 부부가 감당하기엔 미국의 아이돌보미 비용은 너무 비쌌다. 한 사람은 새벽같이 학교에 다녀오고 다른 한 사람은 늦게 출근하여 일하고 오는 방향으로 시간을 조절, 돌보미에게 맡기는 시간을 최소화했다. 힘든 시기였지만 김장주 교수는 “지나고 나니 그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아이와의 첫 눈 맞춤, 하나씩 늘어가는 행동과 애교를 목격하는 즐거움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어린 아이가 7-8개월 되었을 때 옆에 있는 가구를 보조도구로 일어서려다가 넘어지고 또 도전하고를 수없이 반복하는 것을 본 것도 그 때였고 무수한 시도 끝에 어느 날 성공하였을 때 자랑스러운 듯이 아빠를 보고 웃는 것을 본 것도 그 때였습니다. 그 어린아이도 성취 후 보람을 느끼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또한 사람이 걷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노력 끝에 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죠.”

 

이공주 교수는 일하는 여성으로서 출산이라는 첫 난관을 남편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넘겼으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위기가 왔다. 1987년 박사후과정을 마치고 동반 귀국을 했는데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부임한 김 교수와 달리 이 교수는 비슷한 경력을 가지고도 다른 대우를 받았다. ‘박사후과정’이라는 비정규직을 제시받은 것. 여성후배들에게 나쁜 선례를 남길 것 같아 입사를 포기했지만 곧 같은 이유로 생각을 바꿔 입사했다. 잘하는 모습으로 여성후배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귀국 후 1년을 강의 등을 하며 지내던 이 교수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입사해 다시금 연구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 교수의 “즐거운 취미생활”이라는 여성과학기술인 네트워크 구축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그는 뜻 맞는 동료들과 함께 여성 과학자들의 모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1993년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를 탄생시켰다.

 

 

남편의 고비…“기관을 옮길 때 마다 새로 실험실 꾸미는 어려움”

 

 

대전에서 행복하게 지내던 이 부부는 1994년 이공주 교수가 먼저 모교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김 교수 역시 1997년 광주과학기술원 교수로 부임하여 주말부부로 바뀌게 된다. 2003년 김교수가 서울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이공주 교수와 김장주 교수에게는 또 한번 힘든 시기가 된다.


이 교수는 “교수라는 자리는 부임 후 2~3년이 힘들다"며 "새 강의록 작성, 실험실운영, 대학원생 훈련, 과제제안서 작성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는데 혼자서 애들까지 돌보아야 해서 정말 바쁘게 보낸 시기였다”고 말했다.
 

가족들과 떨어져 새로운 연구환경을 꾸려야 했던 김 교수 역시 쉽지 않았다.

 

 “학창시절부터 느낀 건데 저는 변화에 민감하거나 적응을 잘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묻거나 주변사람들을 따라가는 편도 아니어서 아주 오랜 시간 점진적으로 맞춰나가는 편이에요. 제가 87년부터 96년까지 전자통신연구원에 근무하면서 그 때까지 국내에서는 생소한 '분자전자'라는 새로운 연구분야를 시작하였거든요. 따라서 새로운 연구시설을 갖추어야 했고 2~3년을 실험실 꾸미느라 보냈습니다. 또한 97년 광주과학기술원 부임 후 2-3년간 실험실을 SET UP하고 강의에 익숙하여 지고 연구가 궤도에 오를 즈음인 2003년에 서울대학교에 옮기게 되니 또 다시 실험실을 갖추어야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또 다시 연구에 공백이 생기게 됩니다. 박사학위 후에 세 개의 기관에서 세 번 실험실을 꾸며야 하였으니 저 같이 느린 사람에게는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다행히 세 기관 모두 주변에 있는 분들과 학생들이 많이 도와주어 그 힘든 시기를 극복하고 도약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남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이 교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교수는 “남편은 적응이 힘들다고 괴로워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다”며 “관대하고 느긋한 성격이기 때문에 옆에서도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려주면 곧 자기 자리를 찾는다”고 믿음을 표현했다.

 

 

함께하는 성공…“상대의 능력을 인정해주되 연구에 거리감은 필요”

 

 

“남편의 논문은 읽어본 적이 없어요. 읽어봐도 모르죠.”
“신문을 통해 소개되는 정도만 알아요. 이 사람이 프로테오믹스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는 정도 알죠.”

 

김장주․이공주 교수가 오랜 시간 돈독한 동료애와 부부애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거리두기’다.

 

이 교수는 “학문적으로 아예 다른 분야다 보니 학술적으로는 서로 크게 도움이 안 되지만 실험, 강연, 학회 등 학자가 해야 하는 일상적인 활동들은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이 서로 중요도를 잘 이해해주고 있다”며 “너무 같은 분야면 은연중에 서로 비교될 수 있으니 우리 정도의 거리감이 있는 게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교수 역시 “최근 재료 쪽에서 생물이 중요한 분야가 되면서 생물 분야로 진출하는 재료분야 교수가 많아 졌습니다. 제가 그럴 의사가 있었다면 진출이 상당히 용이하였을 테지만 굳이 집에서까지 전공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꺼려져서 생물분야 연구를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과학자부부의 미래…“화려함 보다 성실함 인정해주는 사회가 되길”

 

 

웃는 모습까지 남매처럼 닮은 두 사람은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이 많았지만, 특히 서로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처음으로 돌아가 두 사람의 만남에 부연설명을 하자면, 40여년 전 김장주 교수는 종로에서 서울역까지 걸어오는 내내 이 교수의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어서 계속 고개만 끄덕였다고 했다. 정작 이 교수는 당시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면서, 얼마 후 학교 정문 앞에 찾아온 김 교수의 이야기는 정확히 기억해냈다.

 

“오후 5시쯤 정문 앞을 나서다 마주쳤어요. 무슨 일이냐 했더니 저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와서 서있었대요. 이렇게 사람이 많이 다니는데서 오랜 시간 서있는 것이 창피하지 않냐 물어보니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스쳐지나가며 내가 여기 있는 것도 못 알아챌 텐데 그것이 뭐가 문제냐’며 ‘또 뭐라 한들 나 역시 그런 건 상관없고 중요한건 내가 기다린 당신이 내가 여기 서 있는 걸 본 것’이라고 해요. 대학생일 때 이미 내 느낌을 객관화 해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많이 놀라웠어요.”   

 

‘정말 중요한 것’에 대한 부부의 공통된 가치관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 교수는 “현재로선 끝까지 쉬지 않고, 열심히 잘 연구하고 훌륭한 인력을 양성하는 것과, 여성과학기술인 지원을 위한 봉사가 큰 목표이자 소명”이라고 했고, 그 이후에는 공부하는 능력에 바탕을 두고 사회에 봉사를 하겠다고 한다.


김 교수 역시 연구자로서 성실히 본인의 역할을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그는 “과학처럼 오랜 시간에 거쳐 성과가 나오는 일일수록 묵묵히 본연의 자세에 충실하는 성실함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문화와 환경이 중요하다”며 우리 사회가 밖으로 보이는 화려함을 더 우대하는 것에 대해 경계의 목소리를 냈다.

 

김 교수가 마지막으로 과학계 발전을 위해선 사람과 환경, 역사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장기적 정책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해나갈 때 발전하는 것인데 그러한 일의 가치를 너무 작게 평가하는 것 같아요. 과학기술정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과학계 기관 내부에서 보면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조용히 성실하게 일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의 시간이 모여 형성된 그 기관의 역사가 있고요. 예를 들어 연구소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도 많고, 실제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무언가 변화를 주고 있지만, 단편적인 접근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 우려가 되기도 해요. 과학기술 정책을 세울 때는 구성원과 관련 기관, 역사성, 사회의 변천 그리고 문화까지 매우 종합적으로 접근했으면 합니다.” “또한 한림원 회원들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성공적으로 과학기술 연구를 수행하여 오신 분들이니 그 경험과 노하우를 많은 연구자들과 공유함으로써 과학계 전반에 ‘새 것을 만들어내는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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