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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부부가 사는 이야기] "생계 위해 청소·서빙…연구직은 인생의 선물" 본문

한림원 사람들/회원

[석학부부가 사는 이야기] "생계 위해 청소·서빙…연구직은 인생의 선물"

과기한림원 2015. 2. 26. 22:33

  

[석학부부가 사는 이야기②] 박동호 이학부 정회원․윤정한 농수산학부 정회원 (한림대 교수)
형편 어려워 늦은 유학과 생계 활동 병행
박사학위 위해 4년간 떨어져 지낸 이후 ‘함께’가 최우선 조건
미국대학 ‘종신교수’ 포기 하고 귀국
국내에서 ‘소명’ 찾아 연구 몰입…부부 모두 ‘월화수목금금금’
“퇴임 후에는 좋아하는 일과 해야할 일 균형 맞출 것” 

 

 

 

1994년 여름 미국 네브래스카(Nebraska)주의 한 공항, 이륙을 준비하던 비행기 안에서 미국인 승무원과 동양인 승객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초췌한 행색의 여성 승객이 기내반입이 불가능한 크기의 짐을 들고 타선 무슨 일이 있어도 싣고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

 

“손님, 이 물건은 여기에 실을 수 없습니다.”
“꼭 가져가야 하는 아주 중요한 물건이에요. 한국에선 구할 수도 없는 물건입니다.”

“그럼 수화물 칸에 실어 드릴게요.”
“거기에 실었다 혹시나 망가질까 걱정이 됩니다. 차라리 내가 짐칸으로 갈 테니 내 자리에 이걸 놓아주시면 어떨까요?”

“안전 규정 때문에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럼 일등석 캐비닛에 공간 여유가 있으면 거기에 좀 실어주시면 안될까요?”

“거기에는 여유가 없어서 안되는데... (한숨을 쉬며) 물건이 대체 뭡니까?”
“연구할 때 쓰는 기기인데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 그렇습니다. 저한테는 정말 중요한 거라 꼭 같이 싣고 가야합니다. 부탁 드려요.”

 

완강한 승무원과 필사적인 승객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말다툼을 이어가자 결국 비행기 기장이 조종실에서 나와서 무슨 일인지 물었다. 승객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기장이 “조종실에 실어주겠다”고 호의를 베풂으로써 다행히 상황이 종료됐다.

 

조종실에 안전하게 짐이 실리는 것을 확인한 여성 승객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찾아 앉자, 옆자리에 미리 앉아있던 동양인 남성이 조용히 말을 건넨다.

 

“당신 정말 대단해. 진심이 통했나봐.”


“모든 일이 잘 풀려서 정말 다행이에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박동호 한림대 명예교수와 윤정한 한림대 교수 부부다. 귀국 직후 아직 국내 실험실 연구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무렵, 부부는 방학만 되면 미국에 있는 전(前) 연구실에 가서 실험을 하곤 했는데 윤 교수는 돌아올 때면 자비(自費)를 탈탈 털어 연구 장비와 시약을 사왔다.

 

컴퓨터 외엔 별다른 실험도구가 필요하지 않았던 박 교수는 가끔 아내의 행동이 과하다 생각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새벽 비행시간에 맞추기 위해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실험실 냉동고에 저장해 놓은 세포배양용 송아지 태아 혈청을 찾으러 다녀온다거나, 어렵게 구한 연구장비가 혹시나 깨질까봐 옷으로 둘둘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같은 연구자로서 그 정성과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내가 수입의 많은 부분을 연구에 필요한 경비로 쓰고 있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거기에 대해서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다.

 

“최상의 상태로 시약을 가져오느라 마지막까지 냉동고에 넣어놨다가 새벽에 바쁘게 움직였거든요. 늘 피곤한 몰골로 많은 짐을 들고 다녔으니 누가 절 연구하는 사람으로 봤겠어요. 일화가 많죠. 조종실에 장비 실어줬던 기장은 비행기 내리면서 ‘내가 1분에 한 번씩 발로 찼다’고 농담하더라고요. 그땐 집안 살림보다 실험실이 더 중요했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월급을 거의 다 연구 장비나 시약 사는데 썼어요. 그 덕분에 이후에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으니 후회하지 않아요.”

 

 

동시대에 많은 연구자들이 그러했듯 박동호 교수와 윤정한 교수도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겪으며 연구인생을 걸어왔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학창시절, 불안한 사회·정치적 환경에 제대로 교육이 이뤄지지 않은 대학, 언어 장벽과 차별을 극복해야 했던 유학, 황무지 같았던 국내 연구 환경 등 삶의 모든 순간이 도전과제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끝내 자신의 분야에서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성과를 냈다.

 

현재가 행복한 사람만이 과거의 고난을 추억할 수 있다고 한다. 지나간 일들을 “모두가 감사하다”며 웃음으로 이야기하는 박동호·윤정한 교수 부부를 만나 그들의 ‘추억’을 들어봤다.

 

 

“당신도 공부가 하고 싶었어?”…둘이 돼서 떠난 유학

 

 

박동호 교수는 어릴 때부터 숫자에 관심이 많았고, 학창시절엔 새로운 수학이론을 혼자 탐구해보곤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당시 국내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분위기 속 휴강이 많았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던 박 교수는 1968년 졸업을 앞두고 자연스럽게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그러나 몇몇 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으며 순조롭게 진행되던 유학은 집안사정에 발목을 잡혔다. 홀어머니 슬하에 함께 자란 형 역시 학문에 뜻을 두고 독일 유학중이었던 것. 그는 유학을 포기하고 금성사(현 LG전자)에 들어가 집안의 경제적 가장 역할을 수행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공부를 계속 하고 싶다는 꿈은 커져만 갔다.

 

그때쯤 윤정한 교수 역시 머릿속이 유학 생각으로 가득차고 있었다. 전쟁둥이였던 윤 교수는  학창시절 성적이 우수한 학생 중 하나였으나 특별히 학자의 길을 가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집안 형편이 윤 교수를 대학원에 보내기엔 넉넉지 않은 것도 이유였다. 그러나 막상 졸업 후 모교에서 영양사로 일하기 시작하자 계속 학문적 호기심이 생겼고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마음속에 불타올랐다.

 

1973년 봄, 현실적으로 유학은 힘들다는 판단 하에 차선책으로 모교 대학원에 진학한 윤 교수 앞에 해결사처럼 박 교수가 나타났다. 양가 친척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알면 알수록 비슷한 부분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대학원 진학에 대한 꿈이 같았다. 결국 시기만 엿보고 있던 두 사람은 박 교수 형의 귀국일자와 대학원 입학허가가 결정되자마자 결혼, 두 달 만에 미국유학을 떠났다. 무일푼, 열정만 가득했던 신혼부부의 목적지는 캐나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쪽 땅, 미네소타 주립대학(University of Minnesota)이었다.

 

“사실 제가 결혼으로 아내의 유학을 도왔던 게 아니라 오히려 아내가 구세주였죠. 본인은 아직 대학원 입학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영양사 취업비자로 가서 생활비를 벌겠다고 했어요. 병원 주방에서 환자 급식을 돕는 일을 했는데 출근시간이 빨라 새벽 5시 반쯤 집을 나섰죠. 무릎까지 눈이 쌓인 길을 함께 걸어 직장에 데려다줬는데 어떤 날은 눈도 못 뜨고 저만 잡고 따라오더라고요. 젊었고, 1년뿐이었고, 희망이 있어서 할 수 있었죠.”

 

박 교수의 표정과 눈빛에서 아련하게 그때의 미안함이 떠오르자 윤 교수가 덤덤하면서도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유학 갈 때 항공료도 미국으로 입양되는 아이들 7명을 에스코트해서 충당했어요. 당시에 그렇게 가면 항공료가 무료였거든요. 가서는 실험실 동물 우리 청소도 했고, 일식집 주방 보조도 했죠. 병원에서 큰 손수레에 음식을 잔뜩 싣고 나를 때의 엄청난 무게감은 아직도 생생해요. 그런데 그게 당시에도 고생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1년쯤 일하다 대학원에 진학하며 돈 걱정 없이 공부를 시작했는데, 공부를 한다는 사실 자체로 매우 즐겁고 행복했어요. 그 경험들이 제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계기가 되어 이후 제 일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곳보다 ‘같이 갈 곳’을 찾아봅시다”…4년간 떨어져서 학업

 

 

윤정한 교수가 대학원에 진학해 그 어느 때보다 신나게 공부에 몰두할 때쯤, 박동호 교수는 컴퓨터 분야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당시 새로운 학문으로 떠오르던 신뢰성 분야에 꽂혀있었다. 신뢰성 분야는 기계시설이나 소재부품의 수명을 예측하는 학문으로 공학지식과 수학적 이론, 경영학 등을 바탕으로 제품의 미래를 추리, 예상되는 문제의 해결방안을 고안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당시 신뢰성 분야의 창시자이자 권위자는 플로리다주립대(Florida State University)의 프로샨(Proschan) 교수였는데 미국 국방성에서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받아 뛰어난 연구성과를 내놓고 있었으며 신뢰성분야 연구의 세계적 중심역할을 하고 있었다. 

 

“혼자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에 1978년 아내를 북쪽 끝에 두고 혼자 남쪽 끝으로 왔죠. 그것이 제가 평생을 추구한 학문으로의 입문이었습니다. 다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큰 행운이었는데 신혼이었던 아내와 4년이나 떨어져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로 힘들게 지내게 됐죠. 서로 암묵적으로 ‘이제 절대로 떨어져 지내지 않겠다’ 생각했고 이후에 우리 두 사람의 직장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떨어져있는 기간 동안 윤 교수 역시 평생을 몰두할 새로운 학문을 찾았다.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분자생물학을 영양학에 접목시키는 연구를 하고 싶었던 것. 박사후연구원 시절에는 분자생물학 실험방법을 익히기 위해 박사 과정 학생들의 심부름까지 해줄 정도였고, 광범위한 기초 공부를 통해 실력을 쌓았다.

 

한 층 성장한 두 사람은 4년 만에 네브래스카대학(University of Nebraska)에서 만나 세계적인 연구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활발한 연구를 펼쳐갔다. 박 교수는 그 어렵다는 종신교수(tenure)를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따냈고 윤 교수는 학회에서 발표를 맡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겨 오래 머무를 생각으로 호숫가에 집도 지었다.

 

그러나 생각지 못하게 귀국을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형의 갑작스런 별세였다. 윤 교수에겐 미국에 남고 싶은 수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함께 해야 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박 교수와 같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 돌아오길 잘했다…우리가 필요한 곳에 있을 것”

 


부부가 노력해서 겨우 닫았던 고생문이 한국에 오자마자 다시 열렸다. 미국에서 종신교수를 받은 박 교수였으나 당시 국내엔 신뢰성 이론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한국은 부부가 한 직장에 있는 것에 대해 미국보다 더 보수적이었던 탓에 두 사람을 동시에 받아주는 대학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쌓은 국제적 연구업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수한 연구진을 찾고 있던 한림대학교에서 가장 먼저 알아보고 교수직을 제안했다.

 

박 교수는 귀국을 한국에 신뢰성이론을 알릴 기회로 삼았다. 그는 “우리나라 제조물품을 유럽 등 해외에 수출하려면 신뢰성 인증을 받아야 한다”며 “1990년대 후반, 수출을 늘려가고 있던 정부에서 이를 간파, 신뢰성 기반구축사업을 시작하며 많은 발전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1999년 한국신뢰성학회를 주도적으로 설립, 국내 학자들의 국내외 연구교류 기회를 마련했다.

 

미국의 잘 갖춰진 실험실에서 연구하던 윤 교수는 맨땅에서 실험실 여건을 구축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매주 월화수목금금금이었고 밤낮도 없었다. 대학원생이나 박사후과정 연구원을 구하는 것이 어려워서 학부생들을 양성해 그들을 고급인력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부족한 인력은 본인이 1인 2역, 3역까지 직접 맡았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국제적 저명 학술지에 실릴 논문들이 나왔고 주변에서 인정해주는 사람들도 하나둘 늘어났다. 윤 교수는 “기회를 줬던 한림대나 한림원, 한국연구재단에서 지원한 연구비 등이 있어 연구성과를 낼 수 있었다”며 “항상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처음에는 한국에 돌아오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는데 이제는 그때 귀국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3년 전 퇴임한 박 교수는 여전히 연구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겐 개인적인 연구보다 신뢰성 분야의 미래가 더 중요하다. 그는 “신뢰성 분야의 교육과 연구 분야의 인력양성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싶다”며 “국제교류와 공동연구를 지원하고 연구인력의 저변확대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목표를 소개했다.

 

정년을 한 학기 남겨둔 윤 교수에게는 요즘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들어온다. 현재 해오던 연구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겠지만 퇴임 후에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해볼 생각이다. 그는 “내가 쓴 논문들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여했을까를 생각하면 조금 허무하고 아쉬울 때도 있다”며 “퇴임 후에는 겉으로 보여지는 성과에서 자유로워지는 만큼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해볼 생각”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올해로 결혼 40주년을 맞는 부부에게 마지막으로 함께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부부가 입을 모아 이야기 했다.

 

“서로 연구하는 분야가 많이 달랐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서로에게 도움은 주지 못했어요. 젊은 시절에는 서로 간에 욕심도 많고 직장생활도 충실해야 되기 때문에 가끔은 의견 충돌도 있었죠. 하지만 서로의 노력을 가장 잘 알고 있어서인지 상대방이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자신의 성취보다 더 기뻐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특별한 내조나 외조는 없었지만 서로가 과학기술 분야에서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도록 이해해주는게 큰 힘이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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