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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부부가 사는 이야기] "실험짝이 평생동반자로…혼신의 연구인생 후회는 없다" 본문

한림원 사람들/회원

[석학부부가 사는 이야기] "실험짝이 평생동반자로…혼신의 연구인생 후회는 없다"

과기한림원 2015. 2. 26. 22:06

 

[석학부부가 사는 이야기①]
서정헌 이학부 정회원 (서울대 명예교수), 백명현 이학부 정회원 (한양대 석좌교수)

과거 열악한 연구 환경에 ‘발로 뛰는 교수’ 생활
가사-양육 분담했는데 세 자녀는 ‘놀아준 아빠’만 기억
"국내용 과학은 없다"…국제무대서 인정받는 연구업적 중요
연구자로서 꿈 이뤄…"후배들은 새 분야 개척하길"

 

 

 

“화학은 조를 짜서 실험을 하는데, 학부 2학년 때 둘이 실험 짝이 됐어요. 화학실험은 말 그대로 ‘지지고 볶는’ 과정이거든요. 그거 같이 하다가 평생 짝이 됐죠.”

 

1967년 3월, ‘신동’이며 ‘천재’ 소리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전국의 수재들이 서울대 화학과에 모였다. 그 중 여학생은 단 3명. 바이올린으로 음대를 가려다 집안의 반대로 화학과에 진학한 백명현 한양대 석좌교수가 그 중 하나였다. 동기들 모임에서 언변이 뛰어나고 우스갯소리를 잘해 리더십을 발휘하던 서정헌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와 마음을 주고받으며 국내 과학계에 ‘최초’ 수식어를 독차지하는 석학 부부가 탄생했다. 인공효소를 이용한 바이오테크놀로지 분야 권위자인 서 교수와 신물질 개발과 전이금속 분야 세계적 석학인 백 교수는 부부 최초로 모두 한국과학상을 수상했고, 한림원 제1호 정회원 부부이기도 하다.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함께 시카고대학(The University of Chicago)에서 유학, 서울대에 부임한 것까지 거의 40년을 낮이고 밤이고 한 지붕 아래에서 지냈는데, 집에선 화학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만큼 일에 있어선 각자의 길을 존중한다. 학문 분야가 같다보니 혹시나 서로의 논문에 무임승차 했다는 오해를 받을까 싶어 거리를 뒀고, 그러다보니 완전히 다른 세부 전공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자신의 에너지를 100% 쏟아 부어 혼신의 힘을 다해 연구했고, 과학자로서 목표했던 꿈은 이루었기에 후회가 없다는 화학계의 대표 석학부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가사-양육 분담했는데 세 자녀는 ‘놀아준 아빠’만 기억

 

 

서정헌 교수는 학생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교수법으로도 유명하다. 조민행 고려대 화학과 교수가 그의 제자 중 하나였는데, 석사 1학년 때 아이디어를 들고 오자 “연구에 들어가면 박사과정 학생 서너 명은 너끈히 졸업시킬 정도로 좋은 아이디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학생들의 노력하는 모습을 인정해준 것이다.

 

서 교수는 집에서도 부드럽고 자상한 양육법으로 세 아이들과 어울렸다. 요즘 유행하는 친구 같은 아빠 ‘프렌대디(Friend+Daddy)’였던 셈. 아이들이 유치원 들어가기 전부터 놀이공원이며 연극이며 함께 문화생활을 즐기고 시험 일정도 꼼꼼히 기억해 부족한 공부를 직접 도와줄 만큼 아이들을 잘 챙겼다. 아이들은 당연히 진학이나 고민들을 서 교수와 상의했고, 여전히 “최고의 아빠”로 인정해준다.

 

그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게 내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다”며 “골프나 테니스를 안 하고 그 시간을 모두 아이들에게 썼다”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백명현 교수는 고마움과 서운함을 동시에 느낀다. 취미생활도 없이 아이들을 챙겨준 남편에게는 매우 감사하지만, 엄마의 고생은 잊고 아빠와의 추억만 기억하는 아이들에게 내심 섭섭한 것.

 

“유학생활부터 가사는 제가 다 맡아 했거든요. 바쁜 와중에 이유식, 유아식도 직접 만들어 먹이고, 소풍 간다고 하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오색빛깔 영양만점 도시락을 싸줬는데, 아빠랑 어디 가서 같이 군것질 한 걸 더 잘 기억하더라고요. 지금은 여자후배들에게 항상 ‘가사보단 육아를 해야 한다’고 알려주죠.” 

 

아이를 하나만 낳아도 연구를 지속하기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백 교수는 셋이나 낳아 길렀다. 첫째는 미국 유학시절 낳았고, 첫째와 10살 터울의 둘째·셋째는 귀국 후 교수가 되고 5년 후에 낳은 쌍둥이다.

 

“사실 첫째를 낳고 공부와 아이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죠. 그때 결국 학업을 택하고 아이를 잠시 한국으로 보냈는데, 마음이 매우 아팠지만 학문은 거의 내 생명만큼 소중하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어요. 그 뒤로는 평생 단 한 번도 ‘그만두어야 하나’를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육아와 출산은 여성들에게 힘든 일이지만 나에게 주어진 일이니 감당하고 최선을 다해서 남자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최선을 다해 졸업논문을 쓰기 위해 큰 아이를 한국에 보냈지만 이후 백 교수가 연구와 육아에 있어 어느 하나 소홀했던 부분은 없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는 ‘잠을 한 번 실컷 자보는 게 평생의 소원’이 될 만큼 새벽 2시 이후에 자서 5시 반에 일어나는 강행군이 계속됐다.

 

“외국에 학회 참석하면 일정이 힘들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저는 반가웠어요. 비행기 타고 가면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으니까.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아무리 젊어진다 해도 절대 안 갈 것 같아요.”

 

 

귀국 후 열악한 연구 환경에 ‘발로 뛰는 교수’ 생활…“아이디어로 할 수 있는 틈새 연구 노렸죠”

 

 

서정헌·백명현 교수는 유학을 떠날 때부터 항상 귀국을 염두에 뒀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미국에서부터 한국에서 어떠한 연구를 해야 할 지 고민을 거듭했다.

 

백 교수는 “유학시절 저명한 학술지를 보면 우리나라 국적을 발견하기 힘들었다”며 “한국에 돌아가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논문을 내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은 국제적으로 이름이 있어야지 절대 국내용이 아니다”라며 “한국 연구자의 논문을 꼭 찾아봐야 할 이유를 스스로 제시해야 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서 교수는 “국내 연구 상황이 열악하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우수한 두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을 골라서 진행했다”며 “저비용으로 틈새시장을 노릴 좋은 아이디어를 고민하다가 여러 분야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을 공략했다”고 연구 비법을 소개했다.

 

백 교수 역시 “내 경우에는 사람들이 ‘불가능하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분야에 무조건 도전한 것이 국제적으로 주목 받는 연구성과를 내놓는데 주효했다”고 덧붙였다.

 

부부가 한국에 왔던 1977년 당시 국내 대학들은 연구비, 기자재, 시설, 대학원생 등 무엇하나 갖춰지지 않았던 황무지였다. 실험이 필요한 분야였기에 어쩔 수 없이 기자재는 필요했으므로 장비가 있는 곳을 찾아 전국을 누볐고, 청계천에서 유사한 기계와 부품을 구해 직접 만들어 쓰기도 했다. 말 그대로 발로 뛰는 교수였던 것.

 

서 교수는 “예상하고 한국에 와서인지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다”며 “1980년부터 정부에서 연구비를 조금씩 지원해주기 시작했고 서울대에 병역특례가 도입돼 연구여건이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백 교수 역시 “어려운 시기에 연구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디딤돌 역할을 했다는 것에 만족한다”며 “연구의 자율성 부분에선 오히려 지금보다 여건이 좋았으므로 정말로 연구자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했다.

 

"연구자로서 꿈 이뤄…"후배들은 새 분야 개척하길"

 

 

지난해 초 부부는 모두 정년을 마치고 의무와 굴레에서 벗어났다.

 

백 교수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여성과학자가 되면서 후배들에게 역할모델을 제시하겠다는 꿈은 이루었다고 생각한다”며 “후배 과학자들 중에 잘하는 사람이 많아서 기대가 크다”고 피력했다.

 

이어 그는 “지금의 젊은 연구자들은 새 분야를 개척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며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를 강조하는 풍토가 사라져야 후배들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 역시 “과학을 하면서 놓치는 부분이 많았는데 은퇴가 있어서 우리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며 개인적인 종교 공부도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림원에 혜안을 가진 과학자들이 많으므로 미래 우리나라의 성장동력이 될 분야와 과학기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역할을 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백 교수는 얼마 전 회원수 1300명 이상의 일본 배위화학회에서 국제상을 수상했다.

관련 내용이 일본 과학신문에 기사로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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