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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지킴이가 된 과학자 “내 분야는 마이너나 비전은 메이저였다” 본문

한림원 사람들/회원

문화유산지킴이가 된 과학자 “내 분야는 마이너나 비전은 메이저였다”

과기한림원 2015. 4. 24. 11:56

 


[행복 세상 만드는 과학자②]
이인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한림원 이학부 종신회원 
진화론 동전의 뒷면 '분류학'에 평생 매진
간첩 오해만 수십 차례…기기 없으니 발로 뛰는 연구
기초과학 발전 위해 대중공개강연, SCI 논문, 학부제 도입 시작
꾸준한 사회운동 문화재위원장까지 이어져
"과학기술 분야 지적재산 기록남기기가 목표"

 


“초등학교를 5년만 다니고 월반해서 중학교에 입학했어요. 어린 제자가 걱정이 됐던지 5학년 담임선생님이 저한테 편지를 보내셨는데 '학문하는 길은 등산하는 것과 같다'고 적어주셨어요. 아직도 그 문장이 머릿속에 생생해요. 그 말처럼 학문 영역에서는 어느 길로 가든지 정상에 이르면 다 통합이 됩니다. 자연과학 분야에서 식물학은 마이너 (minor) 중에서도 마이너이고, 문화재 분야에서 천연기념물 분과 역시 마이너 중의 마이너지만 남부럽지 않은 성과를 냈고 인정받았습니다. 마이너 분야에서도 충분히 큰 무대의 메이저 (Major)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연구 평가에 SCI 논문 도입, 대학원생 연구비 지급, 학부제 시행, 공개 과학 강연, 제주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과학기술계는 물론 사회문화 전반에 꽤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 중 일부다. 이들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인규 서울대 명예교수. 그는 주목 받거나 인기 있는 학문분야를 전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연구는 물론이고 교육, 행정, 사회문화 등 다양한 무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다. 


해조류 분류학 연구를 통해서는 대한민국과학기술상을 수상했고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조류학회(Phycological Society of America)의 상을 받는 등 연구성과를 국내외에서 인정을 받았다. 또 사단법인 자연보호운동 활동으로 환경부 홍조근정훈장, 문화지킴이 활동으로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학술부문 대통령상과 문화재청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하는 등 연구 외 분야에서도 활약했다. 


특히 과학자로서 오랫동안 자연보호운동과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한 것이 매우 색다른 경력. 그를 만나 연구자로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동전의 ‘뒷면’ 선택한 과학자…“주목 받지 않아도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을 찾았다”


이인규 교수는 초등학교를 1년 월반해 중학교에 진학했고, 고교시절 내내 학교의 기대를 받는 수재였으나 막상 대학 입학시험을 볼 때 일이 생겨 지각하는 바람에 대학에 낙방했다. 그때가 인생의 전환점이 됐는데, 이후 그는 유행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선택만 했다. 재수해서 식물학과에 진학한 것이 그 첫 번째.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자연과학 안에서 ‘진화’를 공부해보기 위해서였는데 “굶어죽게 될 것”이라며 집안의 반대가 상당했다. 


그는 진화학이라는 복잡한 학문 속에서 그 동전의 뒷면이라는 ‘분류학’, 그 중에서도 가장 원시적인 형태인 해조류를 통해 '생물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하며 일생을 보냈다. 당시 우리나라 각 지역의 생물상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으나 해조류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초창기 그의 연구는 바닷가에서 조류를 채집해 분류하고 이름 붙이는 작업이었다. 우리나라 연안들과 섬은 모조리 다녔고, 독도만 50~60번을 방문했다. 바닷가에서 채집하는 작업을 하다 보니 간첩신고를 받아 잡혀가기 일쑤였고, 야외 출장은 연구비에 포함이 안 돼서 사재를 쓰기도 했다.  


이 교수는 “야생생물학 (field biology)을 기초로 실험생물학이 발전하는 건데 유럽에서는 17~18세기에 야생생물학에 대한 연구를 대부분 마무리했다”며 “그러나 60~70년대 우리나라는 실험기구도 없고 기초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에 대한 연구를 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1980년대부터는 실험실내에서 배양을 시작해 성분화 연구 등을 진행했고, 그가 반평생이 넘는 세월 동안 이루어낸 한국산 해조류의 분류와 생리ㆍ생태학적 연구결과는 지금 생약물질 연구의 귀한 기초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1993년, 서울대 자연대 학장이 되며 그는 교육제도면에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특히 기초과학 강화를 위해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는데, SCI (Science Citation Index:과학기술 논문인용 색인)와 학부제 도입, 그리고 공개강연 개최가 이에 해당된다. 또 기초연구비 확대와 대학원생 연구비 지급이 이루어진 것도 그가 이뤄낸 변화 중 하나. 이를 위해 그는 뜻있는 교수들과 함께 과기처 등을 찾아다니며 필요성을 설득했다. 


그는 “여러 가지 지엽적인 부작용도 있긴 하겠지만 SCI 도입 후 해당 지표가 3배 이상 향상되는 등 국내 연구자들의 해외교류가 많아졌고 공개강연을 통해 많은 청소년들이 과학자로서의 꿈을 키우게 됐다”며 “변화를 이뤄낸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전공 연계한 환경과 문화 보전 활동…“과학기술자도 지적 유산을 남기는 것이 중요”


이인규 교수는 사단법인 자연보호운동의 명예회장이다. 자연보호운동은 새마을운동 이후 시작된 사회운동으로 경제개발과 산업화 이후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전국적인 움직임을 주도했던 단체다. 1980년부터 중앙협의회가 만들어졌는데, 그는 젊은 학자로서 야생생물학을 하며 생태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추천되어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교수는 “물 오염을 비롯해서 환경오염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학술대회와 캠페인 등을 통해 바로 잡았던 것이 가장 보람 있었다”며 “그 경력이 있어 문화재청에서 나를 문화재위원으로 위촉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가 문화재위원으로서 맡았던 것은 천연기념물분과. 경승지·동물 (서식지·번식지·도래지)·식물 (자생지 포함)·광물·동굴에 관한 지정과 해제, 보호와 관리 등에 대한 사항을 심의하는 것이 주요 업무다. 


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연물의 세계유산 지정을 추진했다. 유네스코 (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가 1972년 채택한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문화유산과 지구의 역사를 잘 나타내는 자연유산, 이를 합한 복합유산 중에서 인류를 위해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 유산들을 인정해 등재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등 몇 가지 문화유산의 등재에 성공했지만 자연유산은 지정된 적이 없었고, 세계적으로도 자연유산의 등재는 사례가 많지 않을 때였다.


“저 이전에 천연기념물분과에서 산세가 아름다운 설악산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유네스코 커뮤니티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 신청했는데 파리까지 와서 지정 반대 데모하는 등 주변 상인들의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부결되면 다시 신청을 못하게 되니 결국 정부에서 스스로 취소했죠. 이제는 세계유산 지정이 관광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 검증되며 경쟁이 치열해져서 등재가 쉽지 않습니다. 그때 기회를 놓친 것이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는 설악산의 등재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포기하지 않고 천연기념물 분과위원들과 함께 제주도로 두 번째 도전을 시도했고, 결국 2007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의 세계유산 등재에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기획력과 적극적인 추진력을 눈여겨 본 위원들은 그를 전체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천연기념물 분과에서 위원장을 맡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특히 과학기술자 중에선 그가 최초였다. 


연임을 통해 4년간 문화재위원장을 지낸 그는 2013년을 끝으로 공식 활동을 마쳤지만 여전히 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특히 그가 주장하는 것은 ‘문화재’라는 용어와 개념의 재정립. 


이 교수는 “문화재위원이 되고 난 후 들여다보니 ‘문화재’라는 용어가 왕가의 ‘재산 (property)을 보존’한다는 개념에서 비롯돼 한반도라는 환경에서 만들어진 모든 ‘유산 (heritage)을 보전’한다는 의미를 포괄하지 못한다”며 “18년 동안 활동하며 문화재청을 ‘국가유산청’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했는데 반영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이어 그는 “국가가 유산을 잘 관리하고 보전하는 것은 국가의 품격과도 직결되는 부분”이라며 “문화재는 물론이고 자연환경까지 포함한 모든 국가의 유산들을 온전하게 보호하여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이인규 교수는 “지적자산 역시 마찬가지로 사장되지 않도록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며 과학적 지식의 기록과 계승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그는 “논문 안에 남아있는 것 외에 석학들의 삶과 생각, 연구과정의 시행착오와 극복단계 등이 있으면 후학들이 거기에서부터 학문을 출발할 수 있다”며 “과학기술한림원 회원들을 비롯해 국가 전문가 집단의 경험은 그 자체로 자산이 된다”고 역설했다.

 

“신입생 예비교육 때 강연을 하러 가서 ‘생물과 생물학의 차이를 아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대답을 못해요. 그러면 생물학은 정보가 아니라 지식과 학문이라고, 철학이 있어야 배울 수 있다고 말해주죠. 그리고 수업교재에 들어있는 문장 한 줄 한 줄은 학자들이 청춘과 평생을 바쳐 연구한 내용을 수없이 고치고 고쳐 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니 수월히 읽지 말라고 당부해요. 책에 한 줄 넣지 못한 채 열정을 바친 연구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요. 제 나이가 이제 여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생의 겨울에 들어선 것이죠. 이제 새로운 학문이나 연구보다는 지혜와 지적재산을 남기는 일에 기여했으면 합니다. 5월부터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함께 전통의 가치관이나 인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캠페인 등을 해나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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