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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원 사람들/회원

로봇 인재양성의 代父 “새 분야 개척…평생을 학생처럼 살았다”

과기한림원 2015. 4. 24. 13:59



 

[행복 세상 만드는 과학자③]
염영일 UNIST 명예교수, 한림원 공학부 종신회원

우연한 계기로 의공학 입문…손 해부만 100여 차례

명성 높이며 美가톨릭대 종신교수 받아

포스텍 설립 준비 도와주다 '정'에 이끌려 귀국

지역·산업 위한 일 하다보니 '로봇 代父'

"의사 대상 공학 교육 구상 중“

  


“평생을 학생처럼 살았습니다. 의학에 공학을 접목시키는 분야를 개척하고자 박사학위를 받고도 의과대학에 가서 의대생들과 시체의 손 해부를 130여 차례나 했죠. 류마티즘 진단표 (Index)를 개발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쌓인 진단서를 가져다 분석하기도 했고요. 그때는 거의 공부에 미쳐있었죠.”


염영일 UNIST (울산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로봇 1세대, 특히 생명공학과 기계공학을 접목한 바이오로봇 분야 대부(代父) 중의 하나로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그가 평생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공부하는 학생으로 살았다는 말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염 교수는 1968년 미국 유타주립대 (Utah State University)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1976년에 위스콘신대학(University of Wisconsin)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가톨릭대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기계공학과 교수로 9년간 재직하면서 기계공학과 생체공학 연구에 매진해오다 1987년 포스텍 (POSTECH:포항공과대학교)에 부임했다.


그는 기구학, 로보틱스, 생체역학 연구 분야의 개척자 중 하나로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많은 근육과 뼈 등 미세한 움직임이 많은 손동작 역학연구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또 국내에서는 포스텍 설립 일원 중의 하나로 로봇실험실을 진두지휘하며 철강로봇, 바이오 메디컬 로봇, 지능형 서비스 로봇 등 산업현장 자동화와 지능로봇 개발을 이끌어 왔다.


그러한 경험 덕분에 그는 교수로서의 정년 이후에도 포항지능로봇연구소 소장과 UNIST 석좌교수 등 꾸준히 관련 분야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염영일 교수는 “새로운 것이 계속 만들어지고 변화가 많은 시대를 살아온 것이 평생 학생으로, 그리고 은퇴 없는 교사로 살아온 이유였다”며 “개인적으로는 참 재미있고 복이 많은 시기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1999년부터 한국지능로봇경진대회를 주도하는 등 국내 청소년과 공학도들에게 로봇의 꿈을 심어준 염영일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공위성 보며 키운 과학의 꿈, 미국유학 중 우연히 시작된 융합연구


염영일 교수는 냉전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당시 미국과 소련 (현 러시아 및 주변국)의 우주개발 경쟁이 치열했다. 그는 인간이 만든 별, 인공위성이 지구를 돈다는 사실에 매료됐고, 급기야 친구 몇 명과 함께 미국 NASA(항공우주국)에 편지를 보내 당시 NASA 국장이자 20세기 가장 유명한 과학자 중의 한사람인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에게서 답장을 받았다.


“미국은 사소한 문의라도 항상 답을 해주는 미덕이 있습니다. 폰 브라운에게 직접 답장을 받고는 크게 감명 받아 더욱 과학자로서의 꿈을 키우게 됐죠. 우주공학을 하고 싶었는데 당시에는 관련 학과가 없었으므로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기계공학에 진학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과학도로서의 꿈에 부푼 그는 일찌감치 미국으로 떠났다. 20대 초반 현역으로 군복무까지 마치고, 단돈 50달러를 들고 떠난 유학이었다. 당연히 미국생활은 쉽지 않았다. 학부 중에는 생활비 등을 벌기 위해 늘 학업과 일을 병행해야 했다. 지도교수를 통해 취업허가증을 발부 받아 여름학기가 되면 회사에서 주니어 엔지니어 (junior engineer)로 일하는 식이었다.


그는 “비무장지대 (DMZ)에서 보초를 서며 군 생활 해보니 그보다 더 어려운 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과 육체가 모두 강해졌다”며 “그 경험이 이후 미국에서 힘든 걸 극복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온전히 학업에 집중하게 된 것은 위스콘신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신체운동에 관해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운동학 (Kinesiology)’ 연구실에서 공학적 배경을 가진 연구조교 (research assistant)를 선발할 때 우연히 합류하게 됐고, 이후 학생들이 만든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자동으로 각종 수치 계산을 하는 프로그램을 구축하며 소위 생물학과 기계 및 컴퓨터 공학이 접목된 융합연구에 발을 내딛게 된다. 처음 매료됐던 우주공학은 아니었지만 당시 막 태동되던 생체공학의 개척자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대학원에서 쓴 인간운동 (human motion)에 대한 연구 논문들이 학회의 높은 평가를 받으며 박사 취득 후 취업의 선택 폭이 넓어졌지만 그는 고민 끝에 의학에 공학을 접목시키는 분야를 개척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의공학 연구를 선도하는 아이오와대학 (University of Iowa)의 공과대 겸직교수이자 의과대학 연구실 관리자 (director) 자리를 선택한 것. 특히 손 연구에 몰두했는데 손의 구조와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의대생들과 함께 시신의 손 해부와 실험을 130여 회나 진행하는 등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의공학이나 생체공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 않던 시절, 그의 논문들은 큰 주목을 받았고 미국 내에서도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알려지게 됐다. 4년 후, 그는 규모가 크고 권위 있는 병원들이 많은 워싱턴의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부임, 로봇이란 학문을 정식으로 학부에 도입하기 위한 준비를 맡으며 본격적으로 로봇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포스텍 설립 준비 도와주다 '정'에 이끌려 귀국…지역·산업 위한 일 하다 보니 '로봇 代父'


한국에서 연락을 받은 것은 가톨릭대학교에서 종신교수 (tenure)를 받고, 미국 육군병원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미국에서의 안정된 지위를 만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꼬물꼬물한 아이도 셋이나 얻어 귀국은 생각도 않던 시기였다. 


“고등학교 동창이 아시아에서 제일 좋은 대학을 만들려고 하니 도와 달라고 하더군요. 처음 역할은 신임교수들 선발을 맡는 거였어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능력은 이미 검증이 되어있는 분들이라 한 명씩 워싱턴으로 초청해 오랫동안 이야기 나누며 인성을 봤지요. 새로 만들어지는 학교의 구성원들이니 인화 (人和)가 가장 중요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생각을 못했던 부분은 ‘정(情)’이었지요. 


포스텍 설립과 함께 가톨릭대에 안식년을 받아 포항에 갔는데 제가 선발한 좋은 분들과 함께 의기투합해서 초창기 기반 구축하는 걸 하다 보니 정이 들더라고요. 결국 가톨릭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기 중 하나입니다.”



포스코(POSCO:포항제철)가 설립한 포스텍은 설립당시 포스코  매출의 20%를 연구비로 할당할 정도로 연구중심의 대학이었다. 그만큼 연구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포스코의 경쟁력 강화였다. 분야에 상관없이 200여명의 포스텍 교수는 모두 연구과제 중 일부에 포스텍 생산 철의 부가가치를 높이는데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포스택은 포스코(POSCO:포항제철)가 설립하였으며, 설립당시 포스코 매출의 20%를 연구비로 활당할 정도로 연구중심의 대학이었다.


 

염영일 교수는 당시 국내에는 생소한 분야였던 로봇실험실을 만들고 공장에서 쓰이는 산업용 로봇 개발 등 포스코 생산 과정의 자동화 연구를 진행했다. 1999년부터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국내 최초로 한국지능로봇 경진대회 개최했고, 2006년 국내 유일의 지능로봇 독립연구기관인 포항지능로봇연구소를 설립하는데 일조했다. 


30년 가까이 국내 로봇 연구개발과 산업화에 앞장서 온 그는 요즘도 인재 양성을 강조하며 나아갈 방향에 대한 혜안을 공유하고 있다.


“누가 나보고 로봇 대부라고 하면 난 ‘저는 코끼리의 발톱 정도 알아요’라고 대답해요. 그만큼 로봇은 굉장히 많은 학문이 집약되어있는 분야에요. 학문에 대한 역사와 바탕이 있어야 가능하고 아주 많은 전문가들이 필요하죠. 우리나라처럼 기초 없이 추격형 (catch up) 방식으로 연구개발 역사가 만들어진 곳에선 산업화되기가 매우 힘들죠.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는 로봇혁명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로봇은 세계적인 추세에요. 국내 몇 개 대학이라도 로봇학과가 생겨 고급 인력을 양성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로봇 분야를 이끌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평생 연구자이자 교육자, 그리고 학생으로 살아온 염 교수가 마지막을 향후 계획을 밝혔다. 역시 교육 분야였다. 그는 “의대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재와 교육방법을 개발하고자 한다”며 “공과대학에서는 의공학과 등을 통해 의학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는데 반대로 의대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이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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