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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과학기술계 위인 ‘이호왕 박사’, "하늘이 정해준 길을 갔다" 본문

한림원 사람들/회원

살아있는 과학기술계 위인 ‘이호왕 박사’, "하늘이 정해준 길을 갔다"

과기한림원 2015. 6. 25. 20:04




세계 최초 유행성 출혈열 병원체 발견, 백신 개발

한국전쟁으로 부모와 생이별…"그래도 모친 뜻 따라 의학공부 지속"

인생 바꾼 '미네소타 프로젝트'…美교수 추천으로 박사과정 

70대 1 경쟁률 뚫고 美연구비 지원 받아

현미경 안에 나타난 은하수…한국을 전염병연구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다 

“아이들에게 국가·사회를 위한 큰 야심을 심어주세요”


“내 인생에서 선택권이 주어졌던 순간은 거의 없었습니다. 난 일정(日政) 때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그때는 식민지에 과학기술을 가르치지 않아서 공부를 계속하려면 법학과 의학 밖에 없었지요. 의대에서 내과와 미생물학을 선택한 게 유일한 내 의지였겠네요. 한국전쟁 중 말라리아, 콜레라, 매독, 임질 등 수많은 전염병을 보며 이왕 의사가 된다면 많은 환자들을 돌볼 수 있는 곳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졸업 후 나라의 덕을 입게 됐고, 이후에는 그 은혜를 갚는 길을 갔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하늘이 정해준대로 인생을 살았어요.”


아흔을 바라보는 과학계 대부(代父)의 눈빛과 어조에 총기(聰氣)가 넘쳤다. 내내 진지하고 차분하게 설명하며 눈을 지그시 감고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정확히 짚어냈다. 유행성 출혈열의 병원체를 발견했을 때의 이야기를 하며 간혹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는데 양끝이 아래로 향하는 팔자(八字)눈썹과 함께 소년 같은 모습이 보였다. 


관상학에 따르면 도량이 큰 사람 중에 팔자눈썹이 많다. 무슨 일이든 놀라는 일이 없을 만큼 담력이 세고, 개개의 불평불만 보다는 전체의 일을 파악하고 추진하는 기질을 지녀 정치나 재계의 큰 인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관상을 오롯이 믿을 순 없지만, 한탄 이호왕 박사가 국내외 의학사에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그가 세기의 과학자임은 분명하다.  


1976년 4월, 국제 과학기술계 최약소국 중 하나였던 한국에서 이호왕 박사가 세계 최초로 유행성 출혈열의 병원체를 발견했다.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의학자 2명을 포함해 230명의 미국 연구진이 4천만 달러를 투자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5명의 연구원이 20만 달러로 성공한 것이다. 당시 미국 정부로부터 국립보건원 연구책임자 자리와 높은 연봉, 훌륭한 연구 환경을 제안 받았지만 그는 “과학자에게도 조국애가 있다”며 제의를 거절했다. 이호왕 박사를 ‘한국의 파스퇴르’라고 부르는 데는 미생물학에서의 업적 뿐 아니라 깊은 애국심도 한몫했다. 


메르스(MERS)라는 이국의 바이러스로 온 나라가 혼란스럽던 6월 중순, 이호왕 박사 (한림원 의약학부 종신회원)를 만나기 위해 대한민국학술원을 찾아갔다. 서울에서도 가장 번잡한 장소인 고속터미널을 지척에 두고 있는데도 학술원은 매우 고요했다. 이 박사가 직접 심었다는 백일홍이 학술원 마당에 곱게 피어있었다. 박인비의 패기와 끈기가 돋보이는 경기를 보느라 전날 잠을 조금 설쳤다는 그는 단정한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대한민국학술원과 일본학사원의 배지를 달고 있었다. 그가 스무 살 무렵, 남한으로 넘어온 시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전쟁으로 부모와 생이별…"그래도 모친 뜻 따라 의학공부 지속"


이호왕 박사의 고향은 함경남도 신흥이다. 한남중학교에서 육상선수를 할 만큼 운동신경이 뛰어났지만 시골한의사의 외딸이었던 모친이 의학공부를 권유해 함흥의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한계를 느껴 큰 형을 필두로 하나 둘 월남했고, 그는 서울대학교 본과 1학년으로 입학했다. 월남 직후 터진 한국전쟁은 미처 월남하지 못한 부모와 누이들을 평생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전시(戰時)의 대학교육은 형편없었다. 부산 광복동 동주여상 운동장에 세워진 판잣집에서 2년을 공부했는데 교재도 없이 교수가 불러주면 그것을 베껴서 익히고 시험을 치렀다.  


전선이 안정되어 다시 서울로 돌아오니 그곳은 전염병 전시장이었다. 티푸스, 장티푸스, 말라리아, 콜레라, 매독, 임질, 그리고 유행성 출혈열. 고열과 심한 복통이 오고 얼굴·목·눈의 혈관이 터져 반점이 생기며 나중엔 신장이 파괴되는 유행성 출혈열로 한국전쟁 시 UN군 3200여명이 감염돼 수백 명이 사망했고, 북한과 중공군 역시 수천 명이 발병해 서로 상대방의 ‘세균전’을 의심할 정도였다. 


“3학년이 되면 병원으로 실습을 나가는데 온통 전염병 환자였어요. 다른 질병은 눈에 띄지도 않았지요. 그래서 졸업 후 바로 병원에 들어가는 것보다 유행하는 전염병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대학원에 미생물학을 공부하러 갔지요. 너무 궁핍해서 점심도 굶어가며 세균 배지를 만들던 시절입니다.”



인생 바꾼 '미네소타 프로젝트'…美교수 추천으로 박사과정 


대학원 졸업 후 서울대 의대 미생물학교실 연구조교로 발령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유학의 길이 열렸다. 바로 ‘미네소타 프로젝트(1955~1962)’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한·미원자력협정을 체결하며 연구용원자로 1기 제공과 함께 국내 과학자들의 미국 연수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미네소타대학(University of Minnesota)은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 의대, 공대, 자연대, 농대 교수 226명을 초청해 짧게는 4개월, 평균 2년을 교육시켰다. 이호왕 박사도 선발되어 미국으로 갔는데 당시만 해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정보가 없었다.


“그래도 영어공부는 해야 할 것 같아 떠나기 전 영어로 된 만화책을 자주 봤지요. 만화에서 인사를 ‘Hi’라고 하기에 사전을 찾아보니 신조어라 나와 있지 않더군요. 그래서 ‘히!’라고 읽었지요. 한 번은 강의시간에 교실에 갔더니 50명 듣는 수업에 딱 3명이 앉아있더라고요. 일본 유학생 한 명, 저와 권희역 장관(전 교육부장관)이었죠. 5분 기다려도 오지 않아 사무실에 찾아갔더니 ‘이전 시간에 휴강 공지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도 못 알아들을 정도였어요. 1년 반 정도 지나니까 그제야 귀가 뚫리더군요.”


영어 때문에 좌절하기에는 체계적인 교육과 수업의 기회가 너무나 귀했다. 게다가 국가에서 보내준 유학이었다. 이호왕 박사는 무조건 열심히 공부했다. 수업시간에는 칠판의 내용을 전부 베끼고, 주말에는 미국학생들의 노트를 빌려서 몽땅 옮겨 적었다. 이 박사에 따르면 당시 한국 유학생들이 대부분 그렇게 공부했는데, 그래서인지 영어를 잘 못해도 시험성적은 미국학생들보다 좋았다고 한다. 


어느 날은 시험을 치는데 답안내용을 표로 만들어서 제출했다. 교과서에도 나와 있지 않은 표였다. 채점한 교수가 감탄하며 그의 재능을 여러 차례 칭찬했다. 2년 예정으로 함께 유학 온 50~60명의 의대 교원들 중 단 2명만이 미국 교수들의 선택으로 미국에 남아 박사과정까지 밟았는데 이호왕 박사가 그 중 한 명이었다. 일본뇌염바이러스를 배양한 석사논문과 독창적인 시험지를 채점했던 교수의 추천이 주효했다.


미국에 유학 온 지 4년 3개월 뒤 그는 미국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딴 두 번째 한국인이 되었다. 일본뇌염바이러스의 면역기전을 규명한 학위논문은 당시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면역학회지’에 게재됐다. 


“논문을 위해 원숭이 16마리를 가지고 실험했어요. 원숭이는 실험동물 중에서도 고가(高價)이기 때문에 아무나 실험의 기회를 얻지 못하죠. 4시간마다 경과를 관찰해야 하는 실험이었는데 그걸 할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기회가 생겼어요. 6개월 동안 밤잠을 못 자고 진행했지요.”


이호왕 박사는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는 기초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4년 동안 미국대학의 교과과정에 따라 교육 받으니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며 “당시 수혜의 대상들이 귀국 후 선진교육을 진행한 것이 국가발전에 큰 도움이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70대 1 경쟁률 뚫고 美연구비 지원 받아


1959년 말, 귀국 후 이호왕 박사는 서울대 의대에 전임강사로 부임했다. 학생들과 함께 미군이 쓰던 건물을 직접 청소하고 미네소타 대학의 교과과정을 그대로 가져와 강의와 실습을 진행했다. 일본의 영향이 아직 남아있던 때라 그가 영어교재로 강의하는 미국식 교육을 시작하자 주변의 눈총이 뜨거웠는데 학생들은 그를 ‘호랑이 교수’라 부르며 따랐다. 일생 한 명도 낙제시킨 일이 없이 친절했는데 그의 이름을 발음하기 힘들어 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연구를 지속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나 국내에는 연구비가 많지 않았다. 5·16 군사정변으로 1년간 부산에서 다시 복무하게 되었는데 수업의 의무에서 벗어난 그 시기에 온통 ‘어디서 연구비를 받을 수 있을까’를 탐색했다. 사실 그는 이승만 정부의 방침에 따라 중위로 임관해 군사훈련을 마치고 교수요원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이 들어서며 다시 입대하게 된 것이다. 


“학교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여유시간이 많아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방법을 찾았지요. 그러다 발견한 것이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엑스트라뮤랄 프로그램(extramural program)이었어요. 외국의 학자들을 위한 연구비 지원 프로그램이죠. 딱 3명 선발에 200명이 넘는 사람이 신청할 만큼 경쟁률이 셌는데, 일본뇌염에 대한 연구를 하겠다고 계획서를 내고 석·박사학위 논문을 첨부해서 선정됐어요.”


당시 일본뇌염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문제였다. 1년에 6000-8000명 발생하고 그 중 절반이 죽었다. 뇌염은 대부분 어린아이들이 희생되는데 병이 걸렸다가 낫는다고 해도 뇌에 후유증이 남아 기억력이 나빠지고 공부도 못하고 잘 걷지도 못하게 된다.


이 박사는 1965년부터 5년간 일본뇌염 연구에 매달려 많은 것을 밝혀냈지만 일본에서 먼저 백신을 개발하며 해당 연구를 지속할 수 없었다. 백신 개발 후 환자가 급격히 줄었고, 논에 농약이 많이 치면서 뇌염모기들이 사라져 연구를 해야 할 당위성이 없어졌다.


고심 끝에 다음 연구 주제를 유행성 출혈열로 선택한 것은 역시 미국의 연구비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연구주제를 찾기 위해 미네소타대학과 월터리드미육군연구소(Walter Reed army institute of research)에 방문했을 때 바이러스연구부장인 부셔 대령이 미육군 연구비와 유행성 출혈열을 귀띔해주었다. 미국은 1952년부터 1967년까지 유행성 출혈열을 연구했으나 15년 동안 병원체를 찾지 못하고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그는 1969년 출혈열의 병원체 규명을 위한 연구계획서를 작성해 일본에 위치해 있던 미육군의학연구개발사령부 극동사령부에 제출했고, 5개월 후 “1970년부터 3년간 4만 달러의 연구비를 주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것이 또 다른 운명의 시작이었다.


현미경 안에 나타난 은하수…한국을 전염병연구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다 


유행성 출혈열 연구를 시작하고 6년 동안은 위기와 실패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군부대 주변에서 들쥐를 사냥하다 무장간첩으로 오인 받아 경고사격을 받기도 했고, 감염되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연구원들도 있었다. 숙주로 추정되는 들쥐의 내장을 말 그대로 쥐 잡듯 뒤졌지만 항원을 찾지 못했고, 당시로는 첨단기법인 전기영동법과 한천면역확산법을 동원해 환자의 혈액을 조사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다시 면역형광항체법과 면역전자현미경법이라는 첨단기법을 동원해 병원체를 찾기 시작했는데 이 역시 실패였다. 1975년 미육군의학연구개발사령부에서 1년 후 극동지구를 폐쇄하니 더 이상 연구비를 지급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게 됐다. 


낙담해 있던 그에게 NIH에서 출혈열 연구를 하다 은퇴한 젤리슨(W. F. Jellison) 박사가 자신의 연구결과를 담은 책자와 편지를 소포로 보내왔다. 들쥐의 폐에 기생하는 곰팡이 독소를 살펴보라는 조언이 담겨 있었다. 출혈열 감염환자의 다른 장기에서는 출혈이 생겼지만 유독 폐에는 병변이 생기지 않아 모든 학자들이 조사대상에서 폐를 제외했다. 이호왕 박사도 마찬가지였다. 젤리슨 박사의 조언에 따라 폐를 시험대상에 넣었을 때 현미경 안에 형광항체가 반응하여 노란 빛을 냈다.


타임지에 실린 이호왕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연구를 하니 주변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었죠. 그런데 실상은 아주 열악했어요. 국내 시설이 갖춰지지 않았을 때라 전기며 수돗물이 끊기기 일쑤였고, 연구원은 나를 포함해 5명뿐이었지요. 그런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어요. 실패하면 다시 창의적인 방법을 생각해서 시도했지요. 1975년 10월에 들쥐의 내장 샘플에 환자의 항체가 있는 혈청을 반응시키고 현미경을 들여다봤더니 밤하늘의 은하수 같이 노란 빛이 나타났어요. 새로운 별을 찾아낸 거죠. 흥분을 누르고 6개월 동안 침착하게 수십 번을 반복해 확인했는데 그때마다 현미경 안에 별이 반짝였습니다.”


1976년 4월, 이호왕 박사가 유행성 출혈열 바이러스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열악한 나라에서, 미국 교수 연봉만큼의 연구비로, 그것도 박사학위 받고 10년 밖에 안 된 사람이 50년 묵은 미제(謎題)를 풀었다고 하니 의심부터 돌아왔다. 당장 미국 중령이 서울에 와서 일주일 간 머물며 연구과정과 결과를 검토했다.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 중령은 본국으로 돌아간 후 미국 육군 병원 연구본부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초청장을 보냈다. 이 박사가 강연장에 도착하니 200명이 넘는 석학들이 빽빽하게 앉아있었다. 발표를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는데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다. 한참을 넋을 잃고 앉아있던 강연장에서 잠시 후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코넬대(Cornell University), 예일대(Yale University), CDC(미국 질병통제센터) 등에서도 연구결과를 발표했고, 여러 곳에서 환자혈청과 일반인혈청을 섞어놓고 맹검시험(blind test)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그가 해낸 것이었다.


연구장면


미국을 비롯해 유수의 기관에서 러브콜을 보냈지만 이호왕 박사는 한국에 남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있는 곳이 출혈열 연구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었다. 1984년까지는 병원체를 가지고 있던 이호왕 박사만이 한탄바이러스를 진단할 수 있었기에 전세계에서 혈청을 보내왔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1982년 이호왕 박사의 연구실을 연구협력센터로 지정하고 후원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메카가 되었다.


그는 병원체의 이름을 한탄바이러스라고 명명했다. 한탄강 유역에 서식하는 들쥐로부터 병원체를 발견한 것도 있지만 삼팔선을 따라 흐르는 분단의 상징 한탄강의 이름을 따옴으로써 역설적으로 통일의 염원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세관에서 전화 많이 받았어요. 우리나라하고 협정을 맺지 않은 공산권 국가의 연구자들이 저를 보기 위해 방문했거든요. 심지어 저에게 사전연락을 하지 않고 온 학자들도 있었죠. 제가 보증을 서고 입국을 도와준 사람들만 20~30명입니다. 그들이 꼭 가보는 곳이 한탄강입니다. 독일학자는 3번이나 다녀와선 그 경험을 자세하게 기록해 책을 내더라고요. 새로운 바이러스 하나를 발견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니까 그 현장에 가보고 싶어 했지요.”


한국에 바이러스 발견을 내어준 국제 의학계는 백신을 먼저 개발하기 위해 그에게 더 이상 연구비를 지원하지 않았다. 다행히 WHO에서 2년간 백신연구비를 지원하고 1986년부터는 녹십자사의 후원이 이루어지며 1988년 11월 세계 최초로 효과가 탁월한 출혈열 예방백신을 개발했다. 실패로 끝난 줄 알았던 일본뇌염 백신개발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1990년 9월 ‘한타박스’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백신은 대한민국 국산 신약 제1호였다.


바이러스의 병원체와 진단법, 백신까지 모두 개발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이호왕 박사는 이후에도 국내 학술계를 이끄는 리더로서 대한민국학술원 원장, 대한백신학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UN산하 국제백신연구소(IVI)의 한국후원회장과 한탄생명과학재단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며 연구사업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아이들에게 국가·사회를 위한 큰 야심을 심어주세요”


올해 초,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생이자 미국 공화당 유력 대권주자인 젭 부시(Jeb Bush) 전 플로리다 주지사가 자신의 외교안보 정책 비전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이호왕 박사를 비중 있게 소개했다. 미국의 기여와 헌신으로 지켜진 자유의 힘이 세계를 번창시켰는데 한국의 이호왕 박사가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박사의 업적과 그가 살려낸 수많은 생명들, 그리고 이 박사처럼 잠재력을 가진 수천만 명의 전 세계인들이, 자유를 방어하려는 미국의 도움 속에 각자의 성공 스토리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한 인연이 없는 외국 유력 정치인에게 언급될 만큼 이호왕 박사는 탁월한 성과를 냈다. 그는 전세계 의학 및 미생물학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고, 한국인 최초의 미국과학한림원(National Academy of Science)의 외국인회원이자 역시 국내 최초 자연과학분야 일본학사원(The Japan Academy)의 명예회원이며 여전히 국내에서 가장 가능성 높은 노벨생리의학상 후보다. 그가 유일하게 살아있는 과학기술인으로서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선정하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것은 누구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연구업적 덕이다.


한림원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이호왕 박사는 종이에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4장에 걸쳐 빼곡하게 적어왔다. ‘과학자에게 우연이란 노력할 때 찾아오는 선물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창의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 ‘일생 동안 연구할 수 있는 세계적인 미해결 연구 과제를 택해라’ 등 그의 일생의 돌아보면 허투루 들을 수 없는 조언들을 적어 봉투에 담아왔다.


그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을 마지막으로 전달한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큰 야심을 가지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내가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야심 말이지요. 어릴 때부터 그런 교육을 시켰으면 합니다. 만일에 좀 더 커서 과학기술을 택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되면, 생각을 아주 많이 하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기차를 타든 자동차를 타든 자기가 하는 일을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되면 성공하는 길이 빨라집니다. 그리고 귀인(貴人)은 항상 옆에 있어요. 엄청난 노력을 하면 반드시 귀인이 나타납니다. 제 인생은 그랬어요. 돌아보니 무언가를 선택하지는 못했지만 늘 선택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호왕 박사가 과학기술계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해 자필로 적어왔다. 그대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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