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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연구’를 위한 정책과 제도① 한국 과학기술을 위한 변 본문

정책연구 및 자문

‘좋은 연구’를 위한 정책과 제도① 한국 과학기술을 위한 변

과기한림원 2020. 9. 8. 17:37

과학기술 분야 연구자는 항상 두 개의 상반된 기준 속에서 혼돈을 겪는다. 지식의 발전에 얼마나 크게 이바지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학문적인 기준’, 그리고 그 투자비용에 적합한 성과를 낼 필요가 있어야 한다는 ‘상업적인 기준’이 그것이다.


이 두 기준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상황에 따라 모두 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명제 중 꼭 한 가지에만 충실할 수 있다면 ‘좋은 연구’를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크게 줄어드는데, 대표적인 것이 민간 기업의 연구개발 과정이다. 기업의 최우선 가치는 마땅히 경제적 이익이며, 따라서 경제적 가치가 높은 기술일수록 좋은 평가를 받는다. 반면 국가연구개발비를 사용해야 하는 국책연구는 그 기준을 기업만큼 확실히 하기 어렵다.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여러 분야를 지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론적으로 보면 ‘기초과학’은 학문의 발전에 기여한 정도를 평가하고, ‘산업 및 응용과학’ 분야 연구는 ‘산업의 발전에 도움이 됐는가’를 따지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기준을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정부기관은 과학기술자들을 지원 및 평가하기 위한 기준을 공정하고 세심하게 설계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행정상 문제’로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평가제도의 불합리함을 토로하고 있다. 

기초연구 과제 평가에 ‘경제성’ 항목이 들어가는 이유


 기초분야 연구자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이야기는 “경제논리에 따라 연구성과를 평가하는 경향이 강해 기초학문으로서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는 말이다. 


 왜 이런 이야기가 불거지는 걸까. 이유는 정부연구개발비는 국민 세금이기 때문이다. 즉 ‘연구를 평가한다’는 말에는, 국민의 세금이 올바르게 쓰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내용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기초연구, 응용연구를 막론하고 ‘연구비를 올바르게 사용했는가? 투입한 연구비는 낭비되지 않았는가? 나중에 어떤 성과로 돌아오는가?’를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부의 과학기술 연구비 투자와 평가는 여러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우선 연구비를 지급하기 전 ‘사전평가(혹은 예비타당성 평가)’와 ‘선정평가’가 진행돼야 하고, 올바르게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중간평가’도 필요하다. 종료 후 국가가 원하는 수준에 맞추어 연구결과를 도출했는지 확인하는 ‘최종평가’도 있다. 드물게 연구가 끝난 다음에도 관련 연구성과를 꾸준히 활용하거나 후속연구를 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지속성평가’를 진행하기도 한다. 평가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은 필요에 따라 일련의 평가과정에 대해 가중치를 두는 식으로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연구 아이디어가 훌륭하지만 제한된 비용과 시간 안에 성과를 내기 어려운 경우, 미래를 보고 모험적으로 장기간 연구를 진행하는 경우 등은 사전평가를 간소화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형화할수록 평가 과정에서 ‘지식의 가치’를 경제적 기준으로 세심하게 나누어 평가해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실제로 2018년 이전에는 예비타당성조사를 진행할 때 ‘연구의 경제성’ 항목이 30~40%까지 차지했다. 이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연구과제는 비록 순수한 기초연구라 해도 연구비를 받기 어려웠다. 어렵게 선정이 된다 해도 그 이후 계속 문제가 되는데, 사전에 경제성 평가 항목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 중간평가나 최종평가 과정에서도 계속 걸림돌이 된다. 이 기준은 다소 완화돼 2019년 이후 5~10%로 낮아졌으나, 여전히 어떤 경제성이 있는지 사전에 알기 어려운 대형 기초연구 사업 등에는 걸림돌이 될 소지가 남아 있다. 

산업기술 연구자를 ‘논문 수’로 평가하는 까닭


 기초분야 연구자들은 ‘경제성’으로 평가를 받아 불합리하다고 여기는데, 막상 경제효과를 우선해야 하는 산업 및 응용분야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기초과학을 기준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불만이 나온다. 내용을 상세히 들여다보면, 기초분야 연구자들이 ‘연구평가’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산업 및 응용과학분야 연구자들은 ‘연구자에 대한 평가’ 기준에 대해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제도적 원인은 국내의 연구비 지원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다. 연구비 지원제도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해서 볼 수 있는데, 연구책임자를 정하고, 그 과학자를 믿고 직접 연구비를 주는 경우(직접투자, 흔히 PBS라고도 한다), 그리고 소속 연구기관을 지원하고 그 연구기관에서 연구자를 고용해 연구를 진행하는 경우다. 한국연구재단은 국내 연구예산 중 상당액(약 40% 상당)을 PBS 방식으로 지원하고 있다.


 직접투자의 경우, 정부가 연구과제에 대해 평가하지만 간접투자는 연구기관이 소속 연구자들에 대한 평가를 시행한다. 즉 대학은 교수를, 연구기관은 연구원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대학과 연구소는 연구진을 어떻게 평가해야 옳을까? 평가자 입장에서 양적평가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연구자가 한 해 동안 한 일을 평가하는 것이니 논문 한 편에 몇 점, 학회참석 한 번에 몇 점 같은 정량적 지표가 객관성을 확보하기에 용이하다. 반면 질적평가는 논란의 여지를 품고 있다. 똑같이 1년간 해외 저널에 논문 다섯 편씩을 쓴 연구자 둘에 대해 ‘질적평가’를 우선해 한 사람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때 다른 한 사람이 ‘도대체 질적 평가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항변할 경우, 서로 이해하고 합의하는데 적잖은 노력이 필요해진다.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질적평가’를 수치화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흔히 쓰이는 방법이 저널의 영향력지수(IF)를 활용하는 것이다. 즉 인용이 많이 되는 저널에 투고한 논문에 더 좋은 점수를 주게 되니 산업기술 연구자들이 연구결과를 발표할 때, 관련 산업분야 전문지보다는 기초과학 분야 저널에 발표하려는 욕심을 갖게 된다. 

 


근본적인 틀 ‘거버넌스’를 바꾸자


 국내 대학이나 국책연구기관 소속의 연구자들의 경우 연구비 지원의 출처가 다양한 경우도 많다. 한 연구자가 연구재단의 직접투자 연구비를 취득했다면, 해당 프로젝트의 연구성과 평가, 특히 경제성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함과 동시에 소속기관의 ‘연구자 평가’에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올해 몇 편이 논문을 썼는지, IF가 매우 높은 저널, 혹은 NSC(네이처, 사이언스, 셀) 등의 초일류 저널에 쓴 논문은 있는지, 유명 학회는 몇 번이나 갔는지를 증빙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힉기술 선진국의 경우도 이처럼 복잡하고 모순적인 평가제도를 갖고 있을까. 미국은사실상 PBS제도로만 운영된다. 정부가 운영하는 몇 개의 국책연구기관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과학자가 연구과제를 딴 다음, 책임을 지고 연구단을 꾸려 운영한다. 목표가 명확한 상태에서 인력구성이 이뤄지기 때문에 평가 기준에 대한 혼돈은 상대적으로 적다. 연구프로젝트의 리더는 실적평가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거기에 따르는 다른 연구자들은 맡은 바 임무에 신경 쓸 수 있다.


독일은 대부분의 연구비가 ‘연구회’를 통해 지원이 이뤄진다. 2개 연구회(막스플랑크 연구회, 헬름홀츠 연구회)와 독일연구재단(DFG)이 분야에 맞게 산하 국책연구기관을 지원하며 필요한 경우에 한해 직접투자를 진행한다. 즉 소속 연구자들은 이미 목적이 확고한 상태에서 취업해 연구한다. 전체 연구 실적에 대한 평가는 책임소재를 기관이 가지고 있으므로 소속 연구자로서 ‘실적평가’만 받으면 된다.


호주의 경우는 기초과학 분야는 대학에 대해 직접투자를 진행하지만, 산업 및 응용과학 분야에 관한 정부 투자는 산업과학자원부(DIST) 산하의 연방산업과학연구회(CSIRO)가 총괄하고 있다. 산업과학 및 자원에 관해 연구하는 한 개의 정부연구기관이 전권을 가지고, 다시 산하에 여러 개의 산하 연구소를 두고 운영하는 형태다. 소속 연구자로서는 연구비에 대한 책임소재가 명확한 상태에서 맡은 바 일을 할 수 있다. 


국내의 경우 이와 유사한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기초과학연구원(IBS)이다. IBS의 한 연구단을 이끄는 단장은 연구비를 일괄 운영하며, 연구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즉 ‘연구결과 자체에 대한 평가’나 ‘단장의 자격’에 대한 이견은 간혹 있을 수 있으나 연구단 내부에서 ‘우리는 기초과학자인데 산업기준으로 평가받는다’는 불만은 없다. 연구단이 출범할 때부터 목표가 뚜렷하며, 그에 따라 연구성과에 대한 평가, 그리고 소속 연구자들에 대한 평가 기준도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국가마다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든 ‘연구투자’에 대한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제도와 시스템을 가다듬는 노력을 기울인다. 한국의 정부R&D투자는 연 24조원을 넘는다. 규모가 커진 만큼, 이제는 효율적 분배를 목적으로 움켜쥐고 있던 여러 제재를 풀고, 과학자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명백하게 이전해야 할 때다. 올바른 평가란, 명확한 기준과 제도에서만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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