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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연구’를 위한 정책과 제도③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융합연구 전략 본문

정책연구 및 자문

‘좋은 연구’를 위한 정책과 제도③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융합연구 전략

과기한림원 2020. 9. 8. 17:46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융합연구 전략


 

글. 최양희
서울대학교 AI위원회 위원장(공학부 정회원)
미래창조과학부 장관(′14~′17),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13~′14)

 

 

 

 

 

 

 

 

 

융합은 학문 분야가 아니라 연구하는 방법과 과정
‘다양성의 인정’에서 출발해야

인문학은 융합의 핵심이라고 한다. 왜일까. 차가운 정확성과 정답에 의존하는 과학에 비교하면 문학, 역사, 철학은 개인마다 다른 다양한 상상과 감동을 약속한다. “History failed us. No matter.”라는 강렬한 상징적 문구로 시작하는 이민진의 “파친코”, 시(詩)를 읽는 듯, 상상과 은유로 가득한 한강의 “채식주의자”, 19세기 말 열강의 탐욕에 가득찬 팽창주의를 만화로 녹여 낸 신일용의 “라 벨르 에뽀끄”는 현대 인문학의 속살을 경험하게 해 준다. 과학자나 기술자가 이를 접하고 감동, 반성, 갈등을 느꼈다면 그는 융합의 문턱을 쉽게 통과할 것이다. 인문학이 주는 스토리에 마음을 열고 다양성을 인정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고 이를 과학, 공학에 접목하면 훌륭한 융합이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융합대학원 신설…개방적 공간으로 자연스러운 협력 유도
코로나 이후 온라인 대학교육 플랫폼으로 검토 가치 높아 

십여 년 전 서울대학교에서 융합대학원 신설에 참여한 적이 있다. 21세기 초, 미국에서 불어온 융합 교육, 연구의 바람을 타고 어려운 학내외 인가과정을 통과할 수 있었다. 20세기 내내, 학문은 분화를 거듭하여 100개가 넘는 학과 탄생, 수천 개가 넘는 전공과목의 개설, 또 수천 개에 달하는 학술지가 발간되어 엄청난 학술적 업적을 양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각 세부 전공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이루기가 점점 어려워졌고, 신학문이 진입할 기회조차도 축소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를 타개할 근본 대책으로 시스템적 안목에 기반 한 통합적인 연구, 서로 다른 분야를 묶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융합연구가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에서 이름에 융합을 걸고 학과나 대학원을 신설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있는 접근방안은 아니었는데 융합은 학문 분야가 아니라 연구 방법이나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학과 사이의 벽을 허물고, 연구그룹간의 교류 협력이 활발해지면 융합은 자연스럽게 달성되는 것이지만 국내 대학들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이러한 움직임이 아주 드물어서 당시 융합대학원 신설이라는 충격이 필요했고 많은 대학이나 기관에서 혁신의 틀로 채택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기존의 사고방식, 관습, 전통을 뛰어넘는 새로운 혁신을 이룩하는 것은 정교하고 치밀한 준비, 과감한 집행, 열정적인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융합대학원이 지향하는 것은 새로운 혁신적인 학문연구, 인재양성이었으며 대학원의 슬로건도 “We Innovate”라고 정하였는데 이를 위하여 새로운 캠퍼스, 쾌적한 공간, 새로운 교수진을 준비했었다. 특히 융합과 혁신을 위하여 교수 연구실 배치, 대학원생 자리 배정을 랜덤하게 정하여서 오픈 공간에서 자연스러운 융합을 유도하였다. 또한 교수평가도 연말에 annual activity report를 작성한 교수와 학과장이 같이 검토하면서 교수의 교육연구 역량향상에 초점을 맞추곤 했다. 새로운 시스템으로 무장한 융합대학원은 이제 수십 명의 교수진, 수백 명의 대학원 학생이 포진한 중추연구기관으로 도약하였는데 생명과학, 의학분야를 포용하면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최근 몇몇 미국 중견대학들의 대학개혁 스토리인 “The Fifth Wave : The Evolution of American Higher Education”, 온라인 대학교육의 롤모델인 Minerva School을 보면 앞서 언급한 융합대학원에서 십여 년 전 시도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코로나 사태 이후의 새로운 대학교육 플랫폼으로 검토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한림원 5개 학부 회원 활용한 융합연구위원회 활동 필요
인류 미래를 좌우할 문제 해결로 한림원의 역할해야

과학기술한림원에서 “융합과학기술특별위원회”를 만들고 운영한 적이 있다. 이학부를 필두로 각 학부가 학문 분야의 사일로를 이루고 있다면 융합은 설 땅이 없다고 보았고, 따라서 특별위원회를 통하여 한림원의 새로운 발전을 토의하고 모색하고자 했다. 여러 학부에서 뜻이 맞는 정회원, 준회원, 원로회원이 고루 참여하면서 소통 극대화를 위하여 분위기 좋은 공간을 찾아다니곤 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 거론되는 과학기술 관련 빅 이슈를 보면 한 전공, 한 학부에서 다루기에는 벅차다. 융합적인 이슈의 이해, 해법 탐구가 정답이 아닐까 한다. 기후변화, 에너지, 전염병, 인공지능, 노화 등등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큰 문제들이야 말로 시스템적 융합 연구 주제들이지 않은가. 이제는 융합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확보된 만큼, 주제별 융합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예를 들어 “에너지융합연구회”에는 소재연구(이학부), 바이오매스연구(농수산학부), 방사선연구(의약학부), 에너지하베스팅연구(공학부), 에너지산업구조조정연구(정책학부)가 망라될 수 있겠다. “물융합연구회”, “인공지능융합연구회”, “예술융합연구회”등이 있어서 훌륭한 회원들의 적극 참여로 높은 수준의 보고서가 탄생된다면 한림원의 가치가 더욱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더불어 과학기술한림원을 넘어서 공학한림원, 의학한림원, 과총, 정보통신대연합, 민간 및 대학 Think Tank들과의 연합도 고려할 만하겠다. 모두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때이라고 본다.

다른 분야와의 교류에서 새로운 돌파구 마련
융합적 접근으로 문제 해결 가능

서울대 융합대학원 이후 바로 국내 석학들의 도움으로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의 사업, 조직, 운영을 설계하였는데 당시에도 융합이 매우 중요한 화두이었다. 새로운 돌파구는 종종 기존 분야를 깊이만 파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와의 교류를 통한 상상의 현실화가 동력이 되곤 하였으며 선정된 과제 중 이러한 접근으로 구상된 것들이 꽤 있었다고 기억한다. 특히 수학, 기초과학 등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기발한 연구주제는 X-프로젝트라고 해서 별도로 심사하곤 했다. 이 사업은 이제 전체 사업의 반을 막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창의적이고 임팩트가 크면서 깊이 있는 연구주제, 연구자, 연구그룹을 발굴하는데 획기적인 성과를 내고 있으며 향후의 성과에도 더욱 기대가 크다. 정부가 채택하기 어려운 연구지원 방식을 정교하게 운영한 이 모델은 기업이나 독지가가 어떻게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례이라고 본다.

융합이란 무엇인가. 다양한 대답이 있을 것이다. 융합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지 벌써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융합으로 다룰 문제, 융합으로 해결할 이슈, 융합이 성공하기 위한 교육, 연구, 제도의 보완책에 집중해야 하겠다. 융합이란 담론에 매몰되는 것보다 문제를 발굴하고 융합적 접근으로 하나라도 제대로 풀어보는 것이 더욱 중요할 수 있다. 한림원 회원들의 적극적 관심이 매우 긴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4차산업혁명, 바이오혁명, AI는 같은 개념을 시대적으로 다르게 부르는 것뿐이다. 핵심은 하나, 올바른 융합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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