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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서판(身言書判)으로 살다간 韓 생물학 1호 선비 본문

한림원 사람들/선학회상록

신언서판(身言書判)으로 살다간 韓 생물학 1호 선비

과기한림원 2016. 4. 20. 15:18



박상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故 강영선 박사 회고록

1945년 혜성처럼 등단…생물학계 개척, 거목 제자 양성


우리나라 생물학계 박사 1호로 꼽히는 故 강영선 박사는 1940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세포유전학자였다. 강 박사는 이 외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타이틀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데 해방 전까지 기초생물학을 전공한 대학 졸업자 7인중 유일한 동물학 전공자였으며 대한민국학술원 최초 선출직 회원이었다. 


그는 세계 제2차 대전과 6․25 동란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학문을 시작했으나, 47년 전에 자연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인 ‘네이처(Nature)’와 ‘사이언스(Science)’에 논문을 발표한 한국 과학계의 독보적인 인물이다.


1945년부터 1982년까지 37년간 그가 양성한 많은 제자들은 새로운 줄기를 형성해 각각의 독립된 분야를 성장시키고 발전시켜 오늘날의 화려한 바이오 시대를 연 초석을 이뤘다.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박상대 박사는 “약 40년간의 연구생활 동안 그가 남긴 세포학유전학·집단인류유전학·초파리유전학분야의 학술논문 158편, 저서 13권, 역서 4권 등 총 175편(권)의 기록이 보여주듯 그가 쌓은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강 박사를 회상한다.


강 박사는 1945년 12월말 우리나라 최초의 생물학 관련 학술 단체인 조선생물학회가 창립되던 날, ‘동식물의 배수성에 관한 세포학적 연구’라는 특강을 통해 혜성처럼 우리나라 생물학계에 등단했다. 이는 오늘날 화려한 바이오시대를 연 우리나라 유전체 연구의 효시로 기록되는 기념비적인 학술 행사였다. 강 박사의 제자들은 “분류학 논문이 거의 전부였던 시절, 그가 실험생물학을 기초로 한 염색체에 관해 이날 피력한 내용은 경이 그 자체였다”고 입을 모은다.


강 박사의 연구 활약 뒤에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이라는 그의 정신이 있었다. 박상대 박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강 박사는 ‘운동선수 생활로 단련된 자신의 체력이 고된 연구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는 말을 생전에 남겼다고 한다.


강영선 박사님(오른쪽) 서울 부암동 자택 정원에서.. 출처 : http://blog.naver.com/parkpaulus



혼란한 시대에 세포유전학 영역 개척…생리학, 분류생태학 등 다양한 주제 연구


강 박사의 학문적 주된 관심과 업적은 세포유전학, 집단인류유전학, 초파리유전학이었다. 그는 1945년 해방된 조국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돼 ‘쥐 난자에 대한 세포학적 연구’를 시작했고 열악한 환경에서 1950년까지 7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는 우리나라 생물학계 박사학위 1호 논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 Cornell 대학에서 영양학으로 교수학위를 받은 김호직, 전북대학에서 식물분류학으로 교수학위를 받은 정태현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그는 6.25 전쟁 시기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세계적인 유전학자 골드슈미트 (Goldsmidt)와 커트 스턴(Stern) 교수의 연구실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미국 대학원 교육 시스템을 체험했다. 특히 고가의 장비와 연구비 없이 통계 자료 분석만으로 연구가 가능한 ‘집단인류유전학’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도입, 개척해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업적을 쌓았다. 1954년부터 1969년까지 한국인 집단의 쌍생아 빈도·출생성비·출산력·출생낭비·미각역치·미맹·색맹 등에 대한 한국인의 독특한 인류유전학적 데이터를 분석해 35편의 논문을 냈고 저명 국제학술지와 학회에 실려 세계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1960년대 초에 일본에 앞서 현미자기방사법을 이용한 배양세포 염색체의 DNA합성과 DNA 상대량 연구 등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해 세계적 유전학자로 명성을 알린 업적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가 발표한 전체 논문의 1/3에 해당하는 52편의 세포유전학 논문은 대부분 염색체에 관한 것으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염색체 이상에 의한 선천성 이상질환인 다운증후군(Down Syndrome) 과 터너증후군(Turner's Syndrome)에 대한 핵형을 밝히기도 했다. 박상대 박사는 강 박사와 함께 염색체의 DNA합성을 정량화 할 수 있는 최첨단 현미자기 방사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박상대 박사는 “이 외에도 강 박사님은 가능한 여건 하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연구 주제에 대해 연구했다”고 회상한다. 1973년부터 정년 직전인 1981년까지 강 박사가 연구한 마지막 연구 주제는 어류세포유전학이었다. 분류생태학 연구에도 몰두한 그는 짚신벌레의 미기록종, DMZ의 특산 동물의 생태계, 동해의 만각류 분류상등 대한 4편의 논문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연구 몰두…글과 말에 뛰어난 능력 소유


박 박사가 기억하는 강영선 박사는 ‘시계의 추처럼 정확히 하루의 일과를 예정대로 보내는 분’이다. 강 박사는 할 일 없이 다른 교수들의 방을 기웃거리거나 잠시 마실을 다니는 일도 없을 정도로 철저한 생활을 했다. 출퇴근 시간 역시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로 정확했다. 박 박사는 “가까운 친구도 없으시고 가정을 살뜰히 돌보지 못한 강 박사님은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셨다”고 그분의 고독한 삶을 전했다.


강 박사는 결코 결강을 하거나 조교나 강사에게 대강을 부탁한 일이 없었고 일찍 나가거나 늦게 들어오는 일 또한 없었다고 한다. 그는 강의에 대단히 충실한 교수였는데 완벽한 교재 준비, 쉽고 명료한 그의 강의 내용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부의 명강의로 소문이 났었다.


박 박사는 “연구에서도 그분의 철저한 준비와 노력은 빛났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과학자들에게 울림을 준다”고 말한다. 강 박사는 외국에 나갈 때마다 최근 문헌을 마이크로필름에 담아 왔고 새 실험 테크닉을 손수 습득해 대학원 학생들에게 전수했다. 박 박사는 그분이 귀국하는 여행 가방에 꾸역꾸역 싸온 시약, 실험 기구, 재료 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외화 송금이나 시약 수입이 불가능했던 당시 강 박사는 당신의 여행 경비를 아껴 미국 제자에게 외화를 비축해 놓고 필요할 때 사서 보내도록 할 정도였다. 한국에 없던 세포배양이나 자기방사법에 필요한 혈청, 배양액, 특수 필름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연구에 대한 열정과 제자들을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자 했던 사랑의 정신이 여러 일화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강영선 박사는 연구뿐만 아니라 글과 말에도 탁월했다. 많은 저서와 역서, 수필, 논설, 기고문이 이를 증명해준다. 박 박사는 “그분의 글은 한 번 눈길이 가면 그 끝을 보지 않고서는 뗄 수 없을 만큼 강한 호소력과 문장력을 가졌다”고 자부한다. 강 박사의 성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글씨체는 두 말할 것도 없는 명필이었다.


강 박사는 말이 적고 무뚝뚝했지만 적재적소에 ‘대하지변’의 구수한 화술을 쏟아 놓는 데 따를 자가 없었다. 박 박사는 “작은 일도 그의 가슴 속에 담겼다 나오면 동화처럼 승화돼 아름다워진다”고 그분의 유머 감각을 표현했다.


세포학·유전학의 뿌리로 생물학계 많은 후학 남겨


강영선 박사는 말년에 암수술을 받은 뒤 급속히 쇠약해 가는 중에도 대한민국학술원의 ‘생명복제’ 주제의 국제학술대회를 주관했다. 80세 쇠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몸소 기조강연을 했던 그의 모습은 후학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평생 학문에서 벗어난 일이 없었던 그는 얼마 전 까지 ‘생명 복제의 윤리 문제’에 대한 정부의 위탁 과제를 수행하다 세상을 떠났다.


박상대 박사는 “강영선 박사님의 학문적 명성은 세계 석학 반열에 올려도 전혀 손색이 없으며 그분의 이전은 물론이고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업적을 능가하는 후학들이 많지 않아 더 큰 존경심과 추모의 정을 갖게 한다”고 말한다.


강 박사는 한번 믿은 사람을 끝까지 믿고 돌봐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켰으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한 번 옳다고 결정한 일은 밀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박 박사는 “감히 판단컨대 강영선 박사님은 선비의 기준으로 정한 신언서판(身言書判)의 자질을 모두 갖춘 대학자다”라고 고백한다. 강영선 박사는 신체가 건강하고 용모가 반듯하고 언사가 점잖고 명확하며 필치가 좋은 명문장가이고 생각이 바르고 사물에 대한 판단이 정확한 성품 모두를 갖춘 학자였기 때문이다.


강영선 박사의 세포학과 유전학의 뿌리로 자란 제자들은 각 분야에서 우리나라 생물학계를 대표하며 연구하고 있다. 이제는 제자가 아닌 스승이 되어 우리나라 분자세포생물학을 이끌어가는 박상대 박사는, ‘고독 속에서 학문에 대한 성취와 기쁨만을 삶의 낙(樂)으로 삼았던 그분’의 삶을 다시 떠올린다. 그 때는 다 알지 못했던 스승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심을 새롭게 느낀다.  


위의 글은 박상대 서울대학교 교수의 회상록을 발췌, 요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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