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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원 사람들/선학회상록

“평생 바르게, 후학에게는 호랑이 같이 불호령하시던 모습 선해”

과기한림원 과기한림원 2016. 2. 24. 17:29



서상희 KIST 연구원의 故 최형섭 박사 회고록


저서 13권, 학술논문 120편, 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통령상 발명상, 제1회 한국공학기술 대상, 국회 과학기술연구회상 특별상,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일본 닛케이 아시아상 등. 한국의 과학자 故 최형섭 박사는 간단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를 표현한다면 ‘최초로 한국과학기술연구와 행정의 기틀을 세운 금속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후배이자 KIST 연구원인 서상희 박사는 최 박사의 업적을 ‘보통 사람으로는 이루기 어려운 놀라운 성과’라고 회고록에 표현하며 “예나 지금이나 기초연구부터 응용연구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연구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이것을 이루게 한 원동력은 최형섭 박사의 높은 이상, 굳은 의지, 학문에 대한 열정, 그리고 목표달성을 위한 지독한 집념”이라고 말한다.


최형섭 박사의 꿈은 우리나라에 세계적인 과학기술연구소를 만들어 대한민국을 과학강국으로 만드는 것 하나였다. 


최 박사가 유학시절 중 캐나다 엘도라도연구소 부장으로 일하겠냐는 파격적인 제의를 거절한 일화가 있다. 거절의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일하겠다는 목표 때문이었다. 당시 최 박사는 엘도라도연구소에서 원자로를 만드는 데 중요한 재료인 금속지르코늄의 추출 연구에 몰두했다. 이곳은 겨울철 영하 25도가 넘는 곳이었는데 최 박사는 언제나 밤 12시가 지나서 귀가했다고 한다. 밤낮없이 연구에 혼신을 다한 결과, 세계 최초의 새로운 제련법인 ‘알카리 프릿팅법’ 개발에 성공했다. 서 박사는 회고록을 통해 “같은 과학자로서 당시 최 박사님이 수행하신 연구내용을 살펴보면 그 치밀함과 창의성, 다양한 실험내용에 경이로움을 느낄 정도다”라고 말했다.

 


최형섭 초대소장 무궁화장 수훈 (1996.02.10) <사진=KIST 제공>


산학연협력연구동·최형섭연구동 준공식 (2000.05.24) <사진=KIST 제공>


서 박사는 최형섭 박사가 여느 과학자와는 달리 과학행정에 대한 투철한 이념을 가졌고 학문적 업적 이상으로 심대한 과학행정적 업적을 남겼다고 밝혔다. 최 박사는 국내 최초 소형자동차 제작에 대한 계획을 수립을 시작으로 원자로 개발, 종합제철건설 기본계획, 원자력발전 15개년 계획 등을 수립해 국가 원자력사업을 일정 궤도에 올렸다.


최 박사는 1971년 과학기술처장관을 거쳐 1980년대 한국과학원(현 한국과학기술원)을 설립해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개발 지원체제를 구축했다. 장관 재임 시절에도 KIST를 육성·발전시켰고 연구소간 유기적인 관련을 맺도록 서울연구단지,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을 창안하기도 했다. 


서 박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우리나라 과학기술개발이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함에 있어 최 박사의 신념, 열정, 경륜이 스미지 않은 곳이 없다. 이러한 일을 추진하는 데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 수많은 반대와 난관이 있었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 박사의 진심을 인정함으로써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최형섭 박사는 생전에 후배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내가 과학기술정책에 관해 건의한 내용의 90% 이상을 들어주는 절대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기에 모든 게 가능했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KIST 초대 이사들과의 기념촬영(1966.02.10) <사진=KIST 제공>



박정희 대통령 방문(1969.03.28) <사진=KIST 제공>


서상희 박사에게 최 박사의 업적만큼 존경심을 자아내는 것은 ‘평생을 겸손하고 바르게 살아간 그의 자세’다.  


그의 학창시절 한 일화 중에는 세계적인 대가 밑에서 2년만 있으면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우리나라에 당장 필요한 제련공학 분야를 배우기 위해 학교를 옮겼다는 내용이 있다. 서상희 박사는 개인의 명예와 출세보다는 좀 힘들더라도 나라에 필요한 연구를 해야 한다는 박사님의 신념에 고개를 숙였다. 


서 박사는, 최 박사가 장관직을 그만 둔 후 수많은 곳의 현직 제안을 마다하고 KIST 명예연구원으로 되돌아 왔을 때를 떠올리며 그의 마음가짐을 되새긴다.


서상희 박사는 지금까지도 평생을 언제나 바른 자세로 사시며 후학들에게는 호랑이와 같은 기세로 불호령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전했다. ‘시간관념을 갖지 말고 연구에 전념하라, 연구자는 아예 돈 생각은 하지 마라, 아무리 알아도 결국 아는 게 없으니 겸손하라, 거짓말하지 말고 성실하라’ 등 당신 스스로 몸에 익혀 후학에게 내리는 연구자의 자세에 대한 훈화는 최 박사가 가진 생의 철학이었고 활력과 탐구력, 탁견과 소탈한 성품이 더욱 힘을 발휘한 것이라 그는 회상한다.


서 박사는 “앞으로 과연 어떤 분이 이와 같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고 말한다. 이런 업적은 한 개인의 천재적인 재능과 피나는 노력은 물론 천운과 시운을 함께 타고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다.


“학문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부귀영화에 집착해선 안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대전국립현충원 최형섭 박사 묘비에 적힌 글귀다. 서상희 박사는 이 글귀를 보며 평생을 진정한 연구인으로 살아온 선배 최형섭 박사를 기억한다.   

 

위의 글은 서상희 KIST 연구원의 회상록을 발췌, 요약했습니다.

 

서상희 박사는 KAIST에서 석사학위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KIST에서 연구를 했는데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인 최형섭 박사와 최주 박사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KIST에 입소한 후 특수강연구실에서 특수강 제조공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 연구를 마치고 스텐포드 대학에서 박사후과정을 하면서 반도체 단결성 성장분야에 뛰어들었습니다.

 

이후 KIST로 돌아와  적외선 센서를 국방과학연구소와 공동으로 개발, 국방산업에 큰 기여를 했으며, 레이저프린트와 광통신기기 등 정보 표시기기에 활용되는 청색 발광다이오드 개발연구도 진행했습니다.

 

또 KIST에서 연구활동을 하며 2002년 발족한 21세기 프론티어사업단의 나노소재기술개발사업단 단장으로 10년간 활동했습니다.

 

젊은 시절 대부분을 KIST에서 보냈고 이제 정년을 앞둔 서상희 박사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반도체 단결정성장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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