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닫힌 조선과학사 속 깨어있는 과학기술인 본문

과학기술인 예우 및 시상/과학기술인명예의전당

닫힌 조선과학사 속 깨어있는 과학기술인

과기한림원 2015. 4. 24. 14:46



[명예로운 과학기술인 알리기②-조선후기 서양과학의 전래와 전통과학의 새로운 발전]

허준, 최석정, 홍대용, 서호수, 정약전, 김정호 등 자생적인 근대과학 연구 지속


16세기에 들어서며 유럽에서는 과학기술계의 거장들이 근대과학을 출현시켰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의 혜택을 받고 어릴 때부터 책을 읽고 자란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태양 가까이에 있는 점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다는 원리를 담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판했고, 케플러는 1609년 ‘새로운 천문학’에서 태양을 당당히 태양계의 중심에 놓고 행성의 운동을 부등속 타원운동으로 기술했다. 관찰과 실험으로 이들의 원리를 입증하고 1632년 그 유명한 ‘두 개의 주요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를 출판한 갈릴레오는 말년에 초인적인 힘으로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의’를 완성, 천문학에 이어 ‘역학 (力學)의 혁명’까지 탄생시켰다. 일찍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알아낸 뉴턴은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통해 이를 세상에 발표했다. 


과학이 숨 가쁘게 발전하는 동안 서양인들의 아시아 진출도 많아지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1543년 일본에 처음으로 포르투갈 배가 도착했고, 1549년 스페인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는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워 일본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며 병원을 지어 서양식 의료사업도 시작했다. 1583년 마테오 리치도 중국에 들어가 비슷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일본과 중국은 지속적으로 근대과학을 받아들일 기회를 얻는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이보다 300년 정도 뒤쳐진다. 게다가 조선 또한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면서부터는 중국에 거의 사신을 보내지 않으며 서양 선교사들을 만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서양과학기술에 대한 정보가 점점 더 부족해지며 조선은 근대과학 수용의 역사에서 전반적으로 어두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몇몇 깨어있는 과학기술인들은 자생적인 과학기술 발전사를 써내려갔다. 그들의 활약상을 알아본다. 


동양의학 집대성한 ‘허준’…세계 최고 수준의 전염병 관찰 기록 


신분차별이 심했던 16세기말 서얼 출신들은 천문학, 수학, 의학 등 전문 분야 공부만이 권장되던 시절, 허준 (1546~1615)은 28세에 의과에 합격하여 내의원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1590년 (선조23) 천연두로 죽어가던 왕자 (광해군)를 살려내며 임금의 신임을 얻었다.


다른 의관들이 모두 후환을 두려워해 치료를 하지 않았으나 허준이 나서서 처방을 내리고 병을 고쳤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허준의 가장 큰 업적은 1610년 편찬된 의학서 <동의보감>이다. 동의보감은 선조가 1596년 “그때까지의 모든 의학 서적을 망라해 실용적인 의학서를 만들되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국산 약재를 활용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하면서 시작됐다. 


처음 선조는 1596년 허준, 정석, 양예수, 김응탁, 이병원, 정예남 등에게 동의보감 편찬을 맡겼으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며 흐지부지됐다. 그러나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지시를 내리며 궁중에 있던 의학서 500권을 내어주었고 허준은 혼자서 집념으로 일을 진행, 1610년 유배지에서 편찬을 완료한다.


동의보감은 1편 내경, 2편 외형, 3편 잡병, 4편 탕액, 5편 침구 등 총 5편으로 구성되어있다. 내경은 인체의 모양 등을 담은 일종의 생리학 개론으로 오장육부에 대한 설명을 거쳐 지금의 내과질환을 다룬다. 2편은 지금의 외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비뇨기과, 성병 등을 포함하며, 3편은 구토, 땀, 설사, 열 등 증세에 따른 진단 부분으로 여러가지 진단과 진맥의 방법을 기술했으며, 4편에서는 약품을 소개한다. 물, 흙, 곡식, 사람, 새, 짐승, 물고기, 벌레, 과일, 채소, 풀, 나무, 옥, 돌, 쇠로 나눠져 있는 것이 특이점이다. 5편은 침과 뜸을 다룬다. 


왼쪽부터 동의보감, 영인본 / 언해태산집요, 한독의약박물관 소장


동의보감은 세종 때 <한약집성방>에 이은 향약 운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탕액편에서 여러가지 약품 이름이 한글로 표기되어 있고 많은 국산 약재를 소개한다. 동의보감의 ‘동의’는 중국의학의 상대적 표현이기도 하다. 


허준은 동의보감 이전에도 많은 책을 썼다. 1581년 진맥학 학습서인 <찬도방론맥결집성>을 편찬하고, <창진집>, <태산요록>, <태산집요 번역판> 등을 펴냈다. 허준이 의사로 활동하던 시기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의 외침은 전에 없이 많은 전염병이 이 땅에 흘러들어오는 계기가 됐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쓰러져 시체가 거리를 채웠으므로 허준은 전염병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613년 발진티푸스와 성홍열이 유행하자 <신찬벽온방>과 <번역신방> 등 전염병에 관한 책을 집필했는데, 특히 성홍열에 대한 그의 관찰기록은 동아시아 최초이자 세계적으로도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기록에 속한다. 


조선시대 테크노크라트 '최석정'…오일러 보다 앞선 수학자 


조선 중기에 들어서며 서양학문을 일부 수용하는 학자들이 나타난다. 조선 숙종 후반기에 10번 이상 정승을 지낸 정치가 최석정 (1646~1715)도 그 중의 하나로 그는 주자성리학 뿐 아니라 양명학, 음운학, 수학, 역학, 천문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요즘 말하는 소위 ‘통섭형 인재’로서 숙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던 것. 그는 노론과 소론,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당쟁의 시대를 살았지만, 기본적으로 온건하고 합리적인 정치 노선을 추구하였기에 국가의 주요 정책을 입안하고 현안을 해결하는 관료로서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백성의 어려움 등 현실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데 있어 수학과 과학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의리나 명분에 휘둘려 당쟁에 뛰어들기보다는 수학 및 과학적 사고체계로 합리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최석정은 산수에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박율이 수학책인 ‘산학원본’을 발행할 때 독려하며 서문을 써주기도 했으며, 독일 수학자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가 1583년에 저술한 ‘실용산술개론’을 중심으로 번역해 서양수학을 중국에 처음 전파한 <동문산지>를 조선에 소개한 이도 바로 최석정이었다. 구수략에 인용된 서적의 목록 중 <천학초함>은 서양 계통의 책이며, <명곡집>의 <우주도설> 등에도 서양학문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 있다. 이밖에도 그는 남송시대의 ‘양휘산법’과 원나라의 ‘산학계몽’은 물론 스코틀랜드의 수학자였던 존 네이피어의 <주산>을 인용하는 등 자신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이론을 섭렵하려고 했다. 


역학과 수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구수략>의 저술로 이어졌다. 구수략은 당대의 수학적 성과를 정리하고 연구한 책인데 여기서 그는 세계 최초로 9차 직교라틴방진을 발견, 이를 활용해 마방진을 만들었다. 이러한 업적은 2006년 11월에 발간된 ‘조합론 디자인편람 (Handbook of Combinatorial Design, Chapman & Hall)’에 세계적인 수학자인 오일러 (Euler)의 발견보다도 60여년 이상 앞선 것으로 알려지며 세계 최초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조선의 코페르니쿠스 ‘홍대용’…지전설과 우주무한설 주장


지구가 하루 한 번 자전해 낮과 밤이 생기고, 지구가 한 해 한 번씩 태양 둘레를 돌아서 계절이 바뀐다는 사실을 지금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를 알아낸 것은 채 500년이 되지 않는다. 근대 과학혁명의 시작을 ‘지동설’로 보는 사학자들도 많은 만큼 이는 대단한 발견이다.


홍대용 (1731~1783)은 1760년대 동양사람 가운데서는 가장 처음으로 ‘분명하게’ 지구의 자전을 주장한 우리나라의 실학자다. ‘중국’을 가운데 나라이자 중심으로 여기던 시기로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내세운 사람이 없었다. 


홍대용은 1766년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작은 아버지를 따라 두 달 간 북경에  머물면서 서양 선교사를 세 번 만나 글을 써서 대화하고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찰하는 등의 경험을 했다. 선진 학문 및 서양 과학 문물을 접하면서 이후 그는 서양 과학에 큰 관심을 갖고 이를 배우기에 힘썼다. 


왼쪽부터 송이영, 혼천시계, 1669년, 120x98x52.3cm, 혼천의 지름 40cm, 출처 한국과학사 / 홍대용, 담헌서, 신조선사 발행, 26.0x16.7cm, 1939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홍대용은 ‘지금 서양의 방법은 산수에 그 근본을 두고, 기구를 가지고 참고한다’고 서양 과학의 정신을 정리했다. 아직 서양과학이 제대로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서양과학의 정신을 옳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 서양과학이 실험 관측의 기구와 수학 때문에 발달한 것을 파악하고 스스로 그 방면에 힘쓰기도 했다. 그는 서양 과학의 본질을 흉내라도 내려는 듯 <주해수용>이라는 수학책을 쓰고, 시계, 혼천의, 혼상, 구고의 등 여러가지 관측기구를 만들었다. 


또 <의산문답>은 의무려산에 살고 있는 실옹을 허자가 찾아가 문답하는 형식의 글로 30년 동안의 독서로 세상 모든 지식을 터득한 것으로 자부하던 조선의 선비 한 사람이 중국에서 60일 동안 지내면서 자기학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내용이다. 우주의 무한과 지구의 자전, 대기의 굴절과 생명체의 등급까지 여러 가지 과학사상이 바로 실옹이 가르쳐준 새로운 학문으로 망라되어 나온다. 


홍대용의 근대적 우주관과 자연철학관은 이후 한국 과학사상의 전개과정에서 선각자 역할을 한다. 


조선 후기 최고의 천문역산학자 ‘서호수’…3대에 걸친 과학자 DNA로 기술개발 앞장


조선 후기에 들어서며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들이 유입돼 지식인들을 자극했다. 실학자로 유명한 박제가는 서양 과학기술의 문제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는데, 1786년(정조 10) 서양 선교사 수십 명을 초빙해 한 곳에 살게 하고 그들로부터 서양 과학기술을 배우자는 상소문을 제출하기도 했다.


박제가처럼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당시 서양 과학의 우수성을 중국보다 높게 평가하고 받아들였던 과학기술인 중의 하나로 서호수 (1736~1799)가 있다. 


그는 천문역산 프로젝트 대부분을 맡아서 수행한 조선 후기 대표적인 과학자로 아버지 서명응 (1716~1787)과 아들 서유구 (1764~1845)와 더불어 우리 역사상 위대한 ‘과학기술자 3대’에 해당하는 위인이다. 


먼저 그의 아버지 서명응은 박제가의 대표적 저서인 <북학의> 서문을 쓴 세 사람 중의 하나로 수리 및 천문, 농학, 악률, 행정제도를 포괄하는 학자였으며, 평안감사로 재직할 때는 구리로 만든 활자인 임진자와 정유자를 주조하는 일을 주관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 천문학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졌고, 그런 새로운 지식을 소화하여 <보만재총서> 등 천문학과 농학 분야에서 많은 글을 남겼다. 


서호수의 둘째아들인 서유구는 중국과 조선의 농서를 모두 참고하여 조선 후기의 가장 크고도 상세한 대표 농서인 <임원경제지>를 썼다. 또 서호수의 며느리이며 서유구의 형수인 빙허각 이 씨는 부녀를 위해 한글로 쓴 생활지침 백과사전 <규합총서>의 저자다.

왼쪽부터 국조역상고 / 간평일구.혼개일구 사진


서호수는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여러 곳을 거쳤는데 주로 서울에서 학자에게 어울림직한 관직에 주로 복무했다. 서호수는 1770년 채제공, 홍봉한, 서명응 등과 함께 조선시대 최고의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에 참여했는데 그는 천문학 분야의 <상위고> 집필을 맡았다. 또 서호수는 관상감 제조로서 1777년 혼천의 중수를, 1789년에는 국가 표준 시간체제 정비를 주도했으며 1791년에는 정밀지도를 바탕으로 전국 주요 도시의 위도를 계산함으로써, 전국의 밤낮 시각과 절기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게 했다.


한편 1644년 아담 샬 등이 완성한 서양식 역법 체계인 <시헌력>은 조선에서도 그 직후 1653년에 이미 수입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전에 사용하던 역법, 예를 들면 세종 때 우리나라에 맞게 정비했던 칠정산이 오랜 기간 동안 어긋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새로운 역법을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수입은 했으나 아직 그 구체적 계산 방법이나 의미를 터득하지는 못한 상태로 중국이 구체적인 내용을 비밀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속속들이 배워 익힌다는 일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서호수는 성주덕, 김영 등과 함께 1796년 조선시대 천문역산학의 역사를 기술한 <국조역상고>를 편찬했다. 총 4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권은 천문학의 역사, 위도 계산, 낮밤의 시각, 일식의 계산, 2권은 서울을 기준으로 한 전국의 동서 편도 및 월식 계산법, 3권은 천문기구의 발달사, 4권은 물시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서호수는 <해동농서>에서는 전제의 개혁에서 농기구, 수리 문제까지 다뤘으며, 관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용미차 등의 중요성과 수차의 제조 보급을 설명하기도 했다.


전통 지도학의 완성 ‘김정호’…일제도 감탄한 ‘대동여지도’ 제작


19세기 혼란기를 살았던 김정호 (1804~1860)는 전통 지도학을 완결시킨 지리학자다. 김정호에 대해선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몇몇 사료를 통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지리학에 굉장히 몰두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는 김정호에 대해 "본디 공교한 재주가 많았고 특히 지리학에 깊이 열중했다"고  적혀있으며, 김정호의 벗이며 지원자였던 것으로 알려진 철학자 최한기는 <청구도> 머리말에서 “나의 벗 김정호는 소년 시절부터 지리학에 뜻을 두고 오랫동안 자료를 찾아서 지도 만드는 모든 방법의 장단을 자세히 살피며, 매양 한가한 때에 연구 토론하여”라는 글을 남겼다.


청구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김정호는 18세기 이후 조선 지리학과 지도학의 성과를 훌륭하게 계승, 기존에 있던 지도와 지리서들을 연구하고 그 장점들을 두루 모아 집대성하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그가 만든 최초의 지도는 20대 초반 무렵인 1825년 제작한 <수선전도)>다. 목판본으로 편찬된 이 지도는 한양의 세부적인 지리를 담은 지도였다. 1834년에 편찬한 <청구도>는 조선의 과학적 지도 제작법의 전통을 계승해 종합한 전국지도로서 현존하는 옛 지도 중 가장 크다. 청구도에는 인구 및 전답, 군정, 곡식, 별칭, 군현, 서울까지의 거리 등이 세밀하게 기재되어 있다. 1860년 무렵에 편찬된 <동여도>는 채색지도로서, 대동여지도보다 5000여 개나 많은 최대의 지리 정보를 담고 있다. 


그의 대표적 업적인 <대동여지도>는 1861년 편찬됐다. 동여도를 바탕으로 널리 보급할 수 있도록 목판본으로 제작됐으며, 휴대하기 편리하게 일반적인 서적의 형태로 편집 간행됐다. 30여 년에 걸친 지난한 노력의 결과물인 대동여지도는 조선시대 지도학의 발달사의 절정을 이룬 성과물이며, 오늘날 지도와 비교해도 거의 일치하는 정밀성을 보여주는 우수한 지도다.


왼쪽부터 대동여전도 / 대동여지도 경조 오부 (1861), 목판본, 출처 한국과학사


대동여지도는 분첩절첩식 형태인데 책 모양으로 만든 것보다 휴대하고 다니기에 매우 편리하다.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 22층으로 구분하여 1층을 1첩으로 만들고 22첩의 지도를 위아래로 이으면 전국 지도가 되도록 했다. 1층의 지도는 동서로 80리 간격마다 1절 또는 1판으로 1절을 병풍처럼 접고 펼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글씨를 가능한 줄이고 표현할 내용을 기호로 보여주어 현대지도처럼 세련된 모양이다. 


특히 산을 독립된 하나의 봉우리로 표현하지 않고 이어진 산맥으로 나타냈으며 산맥의 굵기로 산의 크기와 높이를 알 수 있도록 했다. 물길의 경우에도 단일곡선과 이중곡선의 두 가지로 달리 표현해 놓았다. 즉, 단일곡선의 경우 배가 다닐 수 없는 물길이며, 이중곡선은 배가 다닐 수 있는 물길이다. 이는 여행을 할 때 어떤 물길에서는 배를 타는 것이 가능하고, 어떤 물길에서는 배를 타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도로 위 10리마다 점을 찍음으로써 축척을 지도 내용 속에서도 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점은 실제 거리의 10리마다 점을 찍음으로써, 산길이나 꼬불꼬불한 길인 경우 점의 간격이 좁으며 쭉 뻗어 있는 곧은 길은 점 간격이 넓다. 따라서 10리마다 찍힌 점의 상태만 봐도 지형적인 조건이나 도로 상태를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청구도와 동여도를 이른바 김정호의 3대 지도라고 일컫는데 김정호는 지도 제작과 함께 이와 짝을 이뤄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의 3대 지리서를 편찬했다. 1834년경에 펴낸  동여도지는 <동국여지승람>의 필요한 부분을 발췌한 뒤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고, 1850년대에 편찬된 여도비지는 18세기 말 정조시기에 이룩한 정보를 확충해 전국 278개 지역의 경도와 위도를 수록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대동여지도와 짝을 이루어 제작된 대동지지는 조선 지리서 편찬의 전통과 실학적 지리학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책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 한국과학사 (전상운/사이언스북스)

●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 (박성래/교보문고)

● 인물과학사 – 한국의 과학자들 (박성래/책과 함께)

●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과학사 (정인경/다산에듀)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