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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로운 과학기술인 알리기③-과학기술선구자 : 한국 과학기술의 여명을 열다]현대과학으로 가는 다리가 되어준 과학기술인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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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로운 과학기술인 알리기③-과학기술선구자 : 한국 과학기술의 여명을 열다]현대과학으로 가는 다리가 되어준 과학기술인들

과기한림원 2015. 6. 22. 14:47


김점동, 이원철, 윤일선, 조백현 등 일제치하 어려운 여건 속 교육과 연구 열망 불태워 


1870년대에 이르면 산업화를 달성한 유럽과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이 된다.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고 중국을 침략했으며, 프랑스는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미국은 일본을 무력으로 개항시켰다.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과학기술과 산업화를 앞세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무기, 철도, 전기, 선박 등 유럽의 다양한 과학기술은 모두 전쟁에 활용되었다. 


과학기술은 우리나라에도 도착해 굳게 닫힌 조선의 문을 열게 했다. 시작은 1875년 9월 20일. 강화도는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에 휩싸였다. 영국에서 사들인 일본의 신식 전함 운요호는 160mm포와 140mm포를 장비하고 1킬로 밖에서 조준 사격을 할 수 있었다. 이에 맞서는 강화도에는 최대사거리 7백 미터에 명중률도 낮은 구식 홍이포 뿐이었다. 


1876년 2월 10일,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맺었고,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시작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의 수호조약 체결이 이어졌다. 서양의 열강들에게 교역을 허용하고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됐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근대식 학교와 병원을 설립한 것도 그 무렵이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이 왔고, 식민지 땅에서 과학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더욱 줄어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무릎을 꿇게 한 과학기술이 식민지 해방의 꿈을 심어주는 도구이기도 했다. 근대과학이 유럽의 역사를 진보시킨 것처럼 우리도 과학기술을 공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1934년 4월 19일, 과학대중화 운동가 김용관은 ‘과학데이’라는 이름으로 과학의 날 행사를 열었다. 이듬해에는 서울과 평양에서 시가행진을 벌이고 군악대의 연주행사도 진행했으며, '다 같이 손잡고 과학조선을 위해 분기하자', '과학의 황무지 조선을 개척하자', '과학의 승리자는 모든 것의 승리자다'는 내용을 표어로 내걸었다. 과학의 날 행사가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과학기술을 공부하며 우리나라의 미래 등불이 되어준 과학기술인들을 만나본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박에스더)’…“10년간 매년 평균 5000명 환자 진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은 1884년 미국 공사관 의사로 입국한 알렌이 설립한 '제중원'이다. 1900년까지 근대병원의 의사들은 서양 의료선교사들이었고, 한국인 중에서 서양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된 사람은 미국에서 최초로 의사 자격증을 딴 서재필, 일본에서 의학교를 졸업한 김익남, 역시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김점동 등 단 세 사람 뿐이었다. 


그 중 김점동(1876∼1910)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의사이자 현재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유일한 여성 과학자다. 당시 조선에서는 유교문화가 강해 여성의 신교육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가 남성도 이루기 힘든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김점동은 서울 정동에서 딸만 넷인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홍택은 정동교회를 설립한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에게 고용되어 허드렛일을 해주고 있었는데 아펜젤러의 소개로 김점동은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이화학당에는 주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학생으로 입학했다. 여기서 그는 첫 번째 은인을 만나게 된다. 바로 메리 스크랜턴 부인(Mary Scranton, 1832~1909).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온 아들과 함께 조선에 입국한 스크랜턴 부인은 서울 정동 언덕 위의 초가집 19채와 그 옆에 있는 빈터를 사들여 1885년 한국 여성을 위한 교육 기관 이화학당을 세웠고, 1887년에는 이화학당 안에 최초의 여성전문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열었다. 조선여성들이 병에 걸려도 아픈 부위를 남자의사에게 보이는 것을 꺼려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특별히 여의사를 영입해 온 것이다.


보구여관은 1912년 동대문으로 옮겨 신축됐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전신이 되었다


스크랜턴 부인은 영어에 뛰어난 소질을 보이는 김점동을 눈여겨 보았고, 1890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김점동을 보구여관에 추천한다. 15살의 나이에 보구여관의 통역과 간호보조 일을 시작한 김점동은 여기서 두 번째 은인이자 평생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바로 남편과 함께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와있던 로제타 홀(1865~1951). 김점동은 홀 부인이 구순구개열 환자를 수술하는 모습을 보고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늘 헌신적이며 영리한 김점동을 기특하게 생각한 홀 부인은 남편 제임스 홀과 함께 평양 선교 기지의 개척자로 임명 받아 자리를 옮길 때 김점동을 함께 데려간다. 또 남편의 일을 도와주던 청년 박유산을 김점동에게 소개, 두 사람은 1893년 결혼식을 올렸다. 1891년 세례를 받으며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사용하던 김점동은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박에스더'로 활동한다. 


김점동과 남편 박유산의 사진


그러나 평양에 자리를 잡은지 1년, 홀 부인에게 비극이 생긴다. 청일전쟁 중 평양에서 유행하던 발진티푸스에 걸린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 슬픔에 잠긴 홀 부인은 잠시 미국의 친정으로 귀국하는데 이때 의학공부에 대한 꿈과 의지를 갖고 있던 김점동 부부의 유학을 돕는다. 미국에 도착한 김점동은 뉴욕 리버티공립학교에 입학해 고교 과정을 배우기 시작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뉴욕 아동병원에 취직해 일을 병행하며 고학(苦學)을 이어갔다. 유학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둘 다 공부를 하려 했으나 부부가 모두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박유산은 자신의 공부를 포기하고 유학 생활 내내 험한 농장일과 식당일 등을 하며 아내 뒷바라지에 나섰다. 아내의 재능이 더욱 남다르고 공부를 향한 뜻도 강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896년 10월, 김점동은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했고, 각고의 노력 끝에 4년 후 졸업해서 드디어 의사의 꿈을 이루지만 그의 졸업 남편 박유산은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점동의 대학교 졸업사진


의사가 되어 귀국한 박에스더는 먼저 들어와 있던 홀 부인과 함께 보구여관에서 책임의사로 활동하며 여성 환자들을 진료했고 간호양성소도 설립했다. 이후 홀 부인이 죽은 남편을 기념해 평양에 기홀병원(起忽病院)을 세우자,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환자가 있다면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평양의 여성치료소 광혜여원(廣惠女院)에서도 진료했고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며 진료봉사활동을 펼쳤다. 엄동설한에도 당나귀가 끄는 썰매를 타고 환자를 찾아갈 만큼 열성적으로 일해 매년 평균 5천 명이 넘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또 김점동은 교육과 연구, 사회활동에도 열심이었다. 평양맹아학교와 여자성경학원, 간호학교 등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근대적 위생 관념을 보급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또 인공관을 이용하여 방광질 누관 폐쇄수술을 집도하는 등 의미 있는 의료적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고종 황제로부터 은메달을 받았다.


로제타 홀과 자녀들.


그러나 귀국한지 10년째 되던 1910년 4월, 그의 나이 35세에 남편과 같은 폐질환으로 사망한다. 김점동과 늘 함께 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홀 가족의 슬픔은 남달랐다. 홀 부인의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 ~ 1991)은 박에스더의 죽음을 계기로 폐결핵 전문 의사가 되어 1928년 한국 최초의 결핵요양소를 세웠고, 1932년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실을 도입했다. 셔우드 홀은 1940년 스파이 혐의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된 뒤 벌금을 물고 사실상 추방당했다. 


김점동은 한국 의료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지만, 한국 근대 과학의 역사에서도 한국 최초의 여성 과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천문기상학을 개척한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 ‘이원철’


일제강점기, 일본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고등교육을 하지 않았고, 특히 과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1926년 우리나라의 첫 이학박사가 탄생했다. 바로 이원철(1896~1963)이다. 


1896년 경기도 양주에서 이중억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난 이원철은 어릴 때부터 탁월한 기억력과 계산력으로 주위에서 신동 소리를 들었다. 그가 6세 되던 해, 그의 아버지가 사망해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그는 보성고등보통학교(현재 고려대학교의 전신)와 선린상업학교를 거쳐 1915년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의 전신) 수학물리과 1회 입학생이 되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수학교수가 풀지 못하는 난제를 10분 만에 풀어낼 만큼 수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고, 3학년 때부터 학생강사라는 신분으로 2년간 통계학을 강의했다. 1919년 졸업 후 1922년 1월까지 연희전문의 전임강사로 활동했다.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던 그가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서 칼 루퍼스(Carl W. Rufus) 교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루퍼스 교수는 앨비언대학 출신으로 1910년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온 천문학자이다. 이원철은 그의 재능을 높이 산 루퍼스 교수의 도움으로 1922년 1월 미국 미시건주에 있는 앨비언대학(Albion college)에 학부 4학년생으로 편입, 5개월 만에 학사학위를 받고, 1922년 6월에 루퍼스 교수가 천문학 교수로 있던 미시간주립대학교(michigan state university) 천문학과에 입학해 루퍼스 교수의 지도를 받는 학생이 되었다. 


이원철 박사


그는 1년 만인 1923년에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3년 뒤인 1926년 6월에 세페이드변광성(Cepheid variable)인 독수리자리 에타별을 연구하여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연구는 당시 천문학계에서도 매우 앞서가는 연구주제로, 해외과학학술지에 상세히 발표됐다. 그의 학문적 성취는 당시 식민 지배를 받던 우리 민족에게 자긍심을 심어줬고, 독수리자리 에타별은 국내에서 '원철별'로 소개되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는 박사 학위를 받자마자 귀국, 다시 서울의 모교로 돌아와 1938년까지 12년간 연희전문 수물과 교수 및 학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제자들을 길러냈다. 이원철 박사가 귀국할 당시 우리나라는 천문학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교육에 자신의 학문적 열정과 재능을 쏟아 부었고, 행정책임을 맡으며 학교의 운영과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조선에서는 제대로 된 천문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원철의 천문학 강의는 당시 고등교육 수준에서 거의 유일한 천문학 강의로서 연희전문학교의 자랑거리였다. 또 그는 YMCA를 통해 일반인을 위한 과학강좌를 진행하며 과학의 대중적 확산에도 상당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는 1938년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일본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조작해내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고 민족의식이 있는 교수들을 교단에서 몰아냈는데, 그 역시 그 때 교직에서 추방당했다. 1940년 창씨개명령이 내려졌으나 그는 따르지 않았다. 연희전문학교 건물 옥상에는 그가 애지중지하던 15㎝ 굴절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해당 망원경은 1942년 총독부가 전시물자로 징발해가고 말았다.


1928년 연세전문학교의 졸업앨범에는 언더우드관 옥상에 설치된 임시천문대 15cm굴절망원경으로 천체관측법을 강의하는 이원철의 모습이 담겨 있다


광복 이후에 그는 1945년 9월 미군정청 문교부 학무국 기상과장(氣象科長) 겸 중앙관상대(현 기상청)의 대장직을 맡게 되었다. 10월 15일 관상대의 부족한 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관상대 실습학교를 개설, 중학교 이상 졸업자 35명을 선발하여 천문학과 기상예보 과정을 이수시키고 1946년 봄 1기생을 배출했다. 1947년 한국기상학회의 설립에 참여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 8월 정부수립 후 문교부 산하 제1대 중앙관상대장에 임명, 1961년 5월까지 중앙관상대장직을 맡으면서 그는 기상기술원양성소를 설립하여 기상요원을 훈련해 내고 현대적인 기상관측 장비를 들여오는 등 대한민국 기상업무를 본궤도에 올려놓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초대 국립중앙관상대장으로 재직시절의 이원철


이원철은 인하공과대학 설립 과정에 참여하면서 초대학장으로 선임돼 1954년부터 1965년 말까지 신설 대학의 기초를 닦았다. 또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과대학의 통합과정에 합동위원으로 참여했고,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비록 강단에 서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교육과 관련된 역할을 맡으면서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YMCA에 기부하여 마지막까지 사회봉사를 실천했다. 


우리나라 천문학과 기상학의 선구자인 이원철은 척박한 국내 연구여건때문에 과학자로서의 연구는 박사 학위 이후 계속하지 못했지만, 교육을 통해 인재들을 키워내고 기상업무체계를 구축하며 큰 업적을 쌓았다. 


한국 의학계의 태산북두 '윤일선'…"질병의 근원과 싸우는 뿌리가 되겠다"


윤일선


일생 학자로서 곧은길을 걸어간 윤일선(1896~1987)은 명문가 출신이다. 조부 윤영렬은 대한제국에서 육군 참장과 자헌대부를 지냈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공직에서 은퇴하고 여생을 보냈다. 아버지 윤치오는 대한제국 학무국장을 지냈고, 독립운동가였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윤치호가 당숙이며,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은 사촌이다.


윤일선은 1896년, 아버지 윤치오가 갑신정변 때 친일개화파로 몰려 일본에 피신한 후 게이오대학에서 유학 중일 때 태어났다. 일찍 서구문화에 눈을 뜬 그의 부모는 교육열이 대단해 그를 프랑스 가톨릭계 재단의 도쿄 효성소학교에 보냈다. 학교생활은 프랑스식으로 진행되고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학교였다. 이후 아버지 윤치오가 대한제국 학무국장으로 부임하며 귀국, 윤일선은 일출소학교를 다녔다. 


그가 14살이 되던 해 어머니 이숙경을 여의었는데, 이숙경은 남편에게 유언으로 "일선이는 책을 좋아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하니 대학까지 보내 학자가 되도록 하시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며, 이후 임상이 아닌 기초의학 연구를 위해 병리학을 전공하는데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시험을 쳐서 경성중학교에 진학했고, 5년 후 졸업, 다시 일본으로 유학하여 일본 강산 제6고등학교의 제3부 의학계를 들어갔고, 고교 졸업 후에는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임상의학과 기초의학을 꽃과 나무의 관계로 비유하며 "질병의 근원과 싸움으로써 의학 발달의 기초가 되는 것이 더 보람있는 일이니 꽃보다 뿌리가 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윤일선은 1923년 6월에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 동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 당대 유명한 교수였던 후지나미 아키라(藤浪鑑)의 지도 아래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윤일선의 재능을 알아본 후지나미 교수가 그의 등록금을 대신 납부해주는 대신 그를 무급 조교로 활용했다. 윤일선은 교토제국대학 대학원 재학 중부터 졸업 후까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를 비롯해 각지에서 교수 제의를 받았으나 고사하고 연구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내분비선과 과민증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1929년 1월에 교토 제국대학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일본 대학 출신 한국인으로는 6번째이며 한국인 최초의 병리학자를 기록했다.


후지나미 교수는 그를 경성제국대학 의학장에게 추천, 윤일선은 1926년 경성제대 조교로 시작하여 1928년 3월 조교수 발령을 받았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제국대학의 교수가 된 것이다. 사실 후지나미 교수는 그를 조교수로 적극 추천했지만 일본인 의학도들에게 밀려 조교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부임 후 그의 첫 번째 사업은 교내 도서실을 만드는 일이었고, 도시 비용을 모두 직접 부담해 일본과 유럽, 미국에서 의학 서적을 주문했다. 또 그는 세브란스 의전에서 연구실 제도를 처음 도입했고, '세브란스 메디컬 저널', '조선의학회지'와 일본의 각 의학지에 국내외의 논문을 발표하거나 전재하여 세브란스 의전의 존재를 밖으로 널리 알리고 외국 학자들의 연구 논문을 조선인 의학도들에게 소개해주는데 공헌을 했다.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것은 그로 인해 한국인이 한국인 의학 석사, 박사과정 학생들을 가르쳐 석사, 박사들을 양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윤일선은 해방을 맞은 조국에 몇 안 되는 자연과학 학자로서 그가 전공한 의학뿐만 아니라 과학 전반에 대한 폭넓은 이해로 대학교육과정과 대학원 육성에 온 힘을 기울였고, 제출된 과학 분야의 논문을 부산에 피난을 가서도 심사하여 학위를 수여할 정도였다. 그는 65세로 정년이 되던 1961년까지 256편의 연구를 지도했고 152명의 의학 박사를 배출했다.


광복 후 윤일선은 경성대학 의학부장으로 전임되었고, 한국민주당이 창당되면서 그에게도 영입 제의가 들어왔으나 사양하고 경성대학교에서 교명을 변경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학교에 남았다. 또 대한의학협회장, 학술원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뛰어난 외국어실력을 바탕으로 국제학회와 학술회의 등 국제교류 활동도 했다. 1956년에는 교수투표에서 90% 동의를 얻어 서울대 총장에 임명됐다. 서울대 총장 재직 중에는 미국 미네소타대학교와 자매결연을 하도록 추진했고, ICA의 원조를 얻어 학교에 연구시설을 도입, 정비, 증축했으며 300명 이상의 교수들을 교환교수 형식으로 미국 유학을 추진했다. 


그가 총장 시절, 학생들을 보호한 일화들도 유명하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 데모가 계속되자 시위기간 중 윤일선은 교수들을 데리고 직접 학생 시위대의 곁을 지키며 그들을 보호했다. 정체불명의 사람이 누군가가 접근하면 "그대는 어느 학과의 누군가"라고 물어 신원을 확인했고, 최루탄과 총탄이 날아오는 중에도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서서 학생들을 과잉진압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또 체포된 학생들의 구명과 석방을 위해서 경찰서 당국과 직접 교섭에 나섰다. 4.19 혁명 당시에도 시위대 옆을 지켰고, 국민대학교 앞에 이르러 경찰들이 발포 사격을 가하자 그는 학생들의 앞에서 이를 가로막고 중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4.19 혁명 이후 학원가에서 무능교수 배척운동이 발생할 때도 그는 강경책 대신 "순수한 비판행동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학생들을 변호했다.


한편 윤일선은 대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검소하고 결백했으며, 재산 욕심이 없어 교수생활 내내 자동차는 물론 집 한칸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다. 그의 서울 용산구 한강변의 양옥 집은 정년퇴직 후 제자들과 동문회에서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 마련해 준 것이다. 


그는 1963년 원자력병원 초대 원장으로 임명돼 원자력 치료에 대한 연구 및 지원에 힘써 원자력 치료의 기틀을 마련했고, 1972년 한국과학진흥재단 고문, 연암문화재단 이사, 한국아동재단 이사에 위촉됐다. 이후 UNESCO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위원장, 과학기술 후원회 이사장 등을 거쳐 1980년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윤일선은 92세로 타계하기 전까지 교육과 연구에 힘쓴 진정한 학자였다. 그는 근대의학을 우리나라에 도입하고 기틀을 만든 대학자요, 학식과 인격을 겸비한 대학 행정가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과학을 태동시킨 선구자로서 후학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농학의 기틀을 닦은 선구자 '조백현'…"전통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연구의욕 고취" 


조백현(1900~1994)은 1900년 육군참장이었던 조성근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성근은 일제시대 조선인으로 장군이 되어 중장까지 진급한 몇 안 되는 고위 군인이었으므로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매동초등학교를 거쳐 1912년 보상학교에 입학했는데 수학과목에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졸업 후에는 부친의 권유로 1916년 수원에 설립된 우리나라 근대 농학교육기관인 수원농림학교로 진학했는데, 몸이 허약했던 그는 농사실습을 감당하기 힘들어 1918년 다시 시험을 치러 강의 과목 위주의 수원농림전문학교 1회 입학생이 되었다. 특히 그는 화학실험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졸업 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1921년 큐슈제국대학 농학부에 진학해 농예화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수원고등농림학교의 처음이자 유일한 한국인 조교수로 부임, 생화학, 토양학, 발효학, 유기화학 등 농화학 분야를 강의했다. 그는 강의시간 외에는 농사시험장에서 연구에 매진했는데, 토양·비료학 분야에서 연구업적을 남겨 학자로서 자신의 진가를 입증했다. 또한 그는 우리의 전통 식생활을 근대 농·생명과학의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했다. 콩나물, 산나물, 김치 등의 영양학적 가치를 밝히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들 논문은 농학 분야에서 한국인이 발표한 최초의 학술논문으로 꼽힌다. 해방 후에는 메주의 발효, 곰팡이의 분류 및 그에 따른 번식 방법, 된장과 간장 맛의 관계, 고추장의 성분 분석, 개량 메주의 제조법 등을 연구했다. 이들 연구는 전통 식품의 현대화를 통해 우리의 식품산업이 근대적 발전의 길을 걷는 기틀을 마련했다.


서울대농대학장재직시절집무실에서


해방후 조백현은 수원농림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고, 1946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서울대 농과대학의 학장을 맡은 그는 일본인 교수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한국인 교수진을 구성했고 각종 농학 교재를 펴내며 선진 농업을 우리나라에 널리 소개했다. 그는 1962년 퇴임할 때까지 37년 동안 많은 제자를 길러내어 한국 농학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조백현은 우리나라 농학 연구의 기반을 마련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1952년 UNESCO의 초청으로 유럽 대학과 연구소의 자연보존 연구시설 및 분석기술 시찰을 다녀왔고, 이후 국제연합 한국부흥위원단의 원조로 불에 탄 교사를 다시 지을 때 유럽에서 보고 온 새로운 연구시설 및 실험기구로 현대식 연구 실험실을 꾸몄다. 또 1955년 미국 정부의 예산으로 미네소타 대학이 서울대의 재건을 위해 지원해주는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따라 5개월간 미국의 대학 및 연구기관을 둘러보고 온 조백현은 그 경험을 토대로 신관 교사를 짓고 강당을 세웠으며 연구실과 실험실을 만들었다. 일본식 농학에 머물러 있었던 농학이 구미의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시설로 면모를 일신함에 따라 서울대 농대는 당초 농학과 등 8개과에서 잠사학과, 농가정학과, 농교육학과가 증설되어 11개 학과를 둔 현대식 농학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1961년 서울대 농과대학 학장직에서 물러난 그는 행정 업무에서 벗어나며 당시 학계의 관심거리였던 원자력의 농학이용 연구에 몰두해 바로 그해 하와이에서 열렸던 제10차 태평양과학회에서 연구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후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부터 20만 달러에 상당하는 연구장비 및 방사성동위원소 등을 지원 받아 벼농사에서 가장 효율적인 시비(施肥)의 위치 및 시기 등을 알아내는 연구과제를 맡았다. 2년간의 연구 끝에 그는 벼의 표층과 하층에 동시에 주는 전면 시비가 가장 효과적이며, 벼에서 비료를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는 꽃이 분화하는 시기라는 사실을 처음 시험적으로 증명해냈다. 그 같은 연구결과는 1964년 12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되었던 IAEA 국제회의에서 발표돼 적지 않은 반향을 얻었다. 그는 1965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약 8년간 원자력위원회 상임위원직을 맡아 원자력기술을 농업에 이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그는 원자력청에 방사선농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농업 현장의 농업 생산성 향상에 기여했다.


그는 농학과 관련된 학회의 탄생에도 큰 기여를 했다. 1954년 한국농학회 창설과 함께 회장을 맡았으며, 1967년 토양비료학회장, 1972년 식품과학회장, 1967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조백현은 일제강점기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전문적인 연구자로 성장했으며, 또한 후진을 길러내기 위해 평생을 과학기술 교육에 헌신한 농학 연구자이자 농업 개혁가였다. 해방 후 급속도로 과학기술자 사회가 제 모습을 갖춰갈 수 있었던 것은 조백현처럼 자기 자리를 지키며 때를 기다렸던 과학기술자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전통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은 과학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학계에서 그의 위상을 참작할 때, 전통식품에 대한 그의 적극적인 관심이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의욕을 고취시키고 나아가 대중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전통식품이 과학기술의 바탕 위에서 근대적 산업으로 변모하는 데 성공한 것에도 조백현의 기여가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진출처]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http://kast.or.kr/HALL/)


[참고문헌 및 사이트]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http://kast.or.kr/HALL/)

● 인물과학사 – 한국의 과학자들 (박성래/책과 함께)

● 뉴턴의 무정한 세계 (정인경/돌베개)

●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과학사 (정인경/다산에듀)

● 위키백과-인물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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