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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고 세계에서 활약한 뛰어난 과학자들

과기한림원 2015. 10. 22. 16:23


이태규, 김순경, 이임학, 조순탁, 이휘소 등 세계과학사에 남을 연구업적 남겨


한국이 낳았지만 품지 못한 과학자들이 있다. 식민지 치하의 땅, 그리고 해방직후의 가난하고 혼란스러운 국가는 그들의 앎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고, 연구 환경은 매우 미약했고, 정치사회적으로 불안정했다. 욕심내어 가둬두기에 그들은 너무나 뛰어났다. 


세계로 나간 그들은 과학사에 한 획을 그을 뛰어난 연구들로 조국의 국민들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였지만 훌륭한 인재들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고 용기였다. 국내 뿐 아니라 전 인류의 지식의 지평을 넓혀준 명예로운 우리나라 과학기술인들을 소개한다.


한국 최초의 화학박사 이태규…90 평생 새벽1시까지 공부해 후배들에 귀감 


이태규 박사(1902~1992)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2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과정을 마쳤다. 학창시절 내내 수석만 차지했던 그였으나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서는 영어 때문에 적잖이 힘들었다고 한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밤을 새우며 노력한 덕분에 교토제국대학에 장학금을 받으며 진학했다. 


1927년 일본 교토 제국대학 화학과를 졸업했으며 일본 최고의 화학자인 호리바 교수의 지도 아래 1931년 ‘환원 니켈을 이용한 일산화탄소의 분해’라는 논문으로 한국인 최초로 화학 분야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7년 일본인 교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호리바 교수의 추천으로  교토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8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 초청과학자로 재직했다. 프린스턴에 있을 당시 이태규 박사는 헨리 아이링 교수의 연구실에서 반응동력학의 이론을 공부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미국-일본 간의 관계가 험악해지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이 박사는 1943년 교토제국대학 정교수가 되어 양자화학이란 신학문을 일본에 도입했다.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되자 그는 귀국하여 경성대학 이공학부장을 맡았고 이후 서울대학교가 출범하면서 문리과대학 초대학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이 박사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의 발표 후 교수들과 학생들이 분열하는 이른바 ‘국대안 파동’의 여파로 1948년 미국 유타대학의 연구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함께 연구했던 아이링 교수가 유타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이 박사는 25년 동안 근무하며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논문은 ‘비뉴턴 운동이론’이다. 아이링 교수와 공동으로 연구하여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이라고도 불리는 이 이론은 그동안 접근이 어려웠던 비뉴턴 유동현상을 다루는 일반공식을 제시한 것이다.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65년에는 노벨상 수상사 후보 추천위원, 1966년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71년 미국 유타 공립대학교 객원교수, 1973년 한국과학원 석좌교수로 활약했다. 1974년 태평양과학협회(미국 소재) 이사로 선임되었고, 1975년 이론물리센터 소장이 되었다


미국 유타대학교에 재직하며 그는 많은 한국인 제자들을 길러냈다. 한상준 전 한양대 명예총장, 전무식 전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장세헌 서울대 명예교수, 최상업 전 서강대 부총장, 김각중 전 경방회장,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명예회장 등이 있다. 71세 때 한국과학원 명예교수로 옮긴 이후에도 연구 활동을 계속하며 12명의 박사와 24명의 석사를 양성했다. 


이태규 박사는 대한화학회(창립 당시의 명칭은 조선화학회)의 창립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 박사는 초대 및 2대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화학회의 발족은 화학 분야의 정착에 큰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학회 탄생의 도화선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나라 학문 연구의 기반 조성에 촉진제 역할을 했다.


그는 일생을 오직 학문에만 몰두한 학자로서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90 평생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1시까지 꾸준히 공부했으며, 1992년 운명하는 날까지 학술 논문을 손질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가 인정하는 화학자 김순경, “민족을 언제나 소중히 여겨야 한다” 가르침 남겨


김순경 박사(1920~2003)는 1920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농업중학교에 다니던 무렵 화학에 관심을 갖게 돼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진학, 응용화학을 공부했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44년 오사카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으며, 교토대학교 화학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서울대학교 화학과 강사(1946~1947), 중앙연구소 연구원(1947~1949)으로 재직했다.


1951년부터는 서울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부임해 1965년까지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을 위해 전념했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54년 9월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예일대학교 대학원 화학과의 석사 및 박사 과정을 1년 9개월 만에 마치고 1956년 5월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그의 지도교수는 라르스 온사거(Lars Onsager) 박사로서 1968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석학이었다.



박사 학위를 마친 후에는 고국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발전시키기 위해 귀국했으나, 열악한 연구 환경에 한계를 느끼고 결국 좀 더 연구에 열중하기 위해 1961년 미국 브라운대학교 화학과 방문교수로 부임했다. 1966년 미국 루이빌대학교 화학과의 정교수로 초빙되었으며, 1969년부터는 템플대학교 화학과 교수가 되어 1990년 만 70세의 나이로 정년퇴임 시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김순경 박사는 군론, 강전해질용액론, 수리물리학, 반대칭광학 현상, 유체의 수송현상, 화학 반응속도론, 기체의 흡착 이론, 일반적인 통계 역학 및 이론화학 분야에서 72편의 논문과 4권의 저서 및 3권의 역서를 발표 또는 저술하는 학술적 업적을 이뤘다. 특히 그는 ‘군론’을 완성한 대가로 국제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특히 그가 은퇴한 이후인 1999년에 화학과 물리학 문제에 응용한 독보적 연구결과를 정리해 발표한 ‘군론(群論, group theory)’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출판사에서 출판돼 세계적으로 좋은 평을 받은 바 있다.


이태규 박사의 제자이기도 한 김순경 박사는 대한화학회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1946년에 창립된 대한화학회는 1961년까지 학회로서의 활동이 좀 미미한 편이었으나 김순경 박사가 운영체제를 간사장 책임제로 개선하고 초대 간사장직을 수행하면서 활발한 추진력으로 학회 활동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또한 냉전 체제 속에서 구 소련의 반대를 무마해가며 1963년 국제순수화학및응용화학연합회(IUPAC)의 입회 승인을 얻어내 우리나라 화학계의 국제화에 기여했다.


미국에서 유학 후 귀국했을 때 그는 독지가들을 찾아다니며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해외 학술지 구독 모금 운동을 벌였다. 달러 환전이 어려웠던 그 시절 갖은 난관을 돌파하여 대통령의 환전 허가를 받아 해외 학술지 구독을 성사시켜 국내 화학 교육과 연구의 일대 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는 한국을 떠나 있을 때도 평생 조국의 과학기술을 위하는 애국자로서 살았다. 생애 말년에 그의 한 제자가 조국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충고를 부탁하자 그는 “무슨 일을 할 때든 언제나 우리 민족을 소중히 해야 한다”고 답변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KSEA를 창립하기 전인 1968년 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화학자 및 화공학자가 참여하는 재북미한인화학화공학자협회를 창립해 초대 부회장 및 2대 회장을 역임했다. 1970년대에는 과학기술처 장관을 도와 정책 자문을 하며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아낌없는 봉사를 했다.


특히 그는 해방 직후와 6.25전쟁 후의 혼란기에 예리한 지식과 자상한 인품을 겸비한 지성인으로서 후학들을 양성했으며, 그들이 오늘날 화학계의 중진이 되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1년 대한민국학술상, 1972년 국민훈장 동백장, 199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세계수학사에 이름을 남긴 이임학, 한국인 최초 국제 저명 학술지에 수학논문 발표


이임학 박사(1922~2005)는 192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함남중학교를 거쳐 1939년 경성제국대학 물리학과를 입학, 1944년 졸업했다. 관심사는 수학이었으나 당시 수학과가 없어 물리학과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일제의 식민정치 때문에 대학 전체에 대해 반감을 가져 일본인 교수가 강의하는 수학 강좌에 나가지 않고 거의 독학으로 수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에는 조선비행기회사의 기술자로 취직해 중국 봉천(현재의 심양)에서 제품을 검사하는 일을 맡아했으나 해방 후 1946년, 24세의 나이로 경성대학교(현 서울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되었다. 그는 경성대와 서울대 수학과에서 현대대수학, 고급정수론, 위상수학 등을 가르쳤다. 그 시기에 미분적분학은 그랜빌 스미스 롱리의 영문판 책을 교재로 많이 사용했는데, 이임학은 그 책의 편역판을 1948년에 처음 출판했다. 그는 이후에도 7권의 대학교재를 저술하는 등 해방 시기의 수학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박사는 1947년 우연하게 남대문시장에서 미군들이 버린 책 중에서 미국 수학회지(Bulletin of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를 발견했고, 거기서 막스 초른이라는 유명한 수학자의 논문 중 미해결문제를 풀어 막스 초른에게 편지를 보냈다. 막스 초른은 이를 이임학 박사의 이름으로 미국 수학회지에 대신 투고하여 채택됐다. (Ree, Rimhak On a problem of Max A. Zorn. Bull. Amer. Math. Soc. 55, (1949). 575-576) 해당 논문은 국제 저명 학술지에 발표된 한국인 최초의 수학 논문이나 그는 캐나다에 유학을 가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임학 박사는 미군정청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서울대를 그만뒀고, 1953년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스티븐 제닝스 교수의 지도 하에 2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유한단순군의 연구에 크게 기여했고, 그의 연구는 세계 수학사에 중요한 연구업적으로 남아 있다.


가장 권위 있는 수학자들의 역사서인 프랑스인 다외도네의 ‘순수 수학의 파노라마’에는 군론에 이바지한 위대한 수학자 21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임학 박사를 꼽았으며, 일본의 저명한 ‘이와나미’ 수학사전에도 그의 리 군 이론이 기록되어 있다. 영국 수학 아카이브 수학사 사이트에도 한국인 수학자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임학 박사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수학자였지만, 캐다가 유학 후에는 캐나다 국적으로 생을 보냈다. 6.25전쟁 당시 이임학 교수가 참전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캐나다 주한 영사관에서 여권을 몰수했기 때문이다. 졸지에 무국적자가 된 이 박사는 캐나다 동료 교수들의 노력과 캐나다 정부의 배려로 영주권과 시민권을 얻었다. 그의 모든 연구는 한국인 이임학이 아닌 캐나다인 이임학으로 학계에 소개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론물리학자 조순탁, 국내 통계물리 분야 발전 이끌어


우리나라 최초의 이론물리학자로서 우리나라 물리학 교육과 토착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조순탁 박사(1925~1996)는 1925년 전라남도 승주(현 순천)에서 태어나 1937년 서울 교동 공립보통학교를 졸업, 경기 공립중학교를 거쳐 1944년 일본 제3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일본 교토대학 이학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해방을 맞아 중도 귀국,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에 편입하여 1947년 제1회로 졸업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대 물리학과는 정식으로 수업을 가르칠 만한 여건을 갖추지 못해 오히려 그가 학생신분으로 후배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194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물리학 석사학위를 받고 그 해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의 전임강사로 부임, 거의 독학으로 물리학을 시작해 후배 양성을 하다 1955년 만학도로 미국 미시간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미국 유학시 그는 당시 세계 통계 물리학계를 좌지우지할 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대학자 조지 울렌벡(George E. Uhlenbeck) 교수의 지도 아래 '고밀도기체의 운동론(The Kinetic Theory of Phenomena in Dense Gas)'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해당 논문에는 이른바 조-울렌벡 이론(Choh-Uhlenbeck Theory)이 담겨있는데 이 이론은 비평형통계역학 연구의 교과서적인 모형으로 기억되며 이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1958년 미시간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귀국 후 다시 서울대학교에서 1964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새로 개교한 서강대학교로 옮겨 10년간 이공대학장 등을 역임하면서 후학 양성과 교육행정에 주력했다. 1967년에는 미국 록펠러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1974년 그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원장으로 취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KAIST가 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KAIST가 안정기에 접어들게 된 데에는 조순탁 원장의 역할이 컸는데, 이 같은 공로로 그는 연임에 성공해 KAIST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인 6년간 원장직을 맡았다.


이후 한국표준연구소 부이사장, 통신기술연구소 부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과학 및 물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83년 한양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취임 후 1990년 정년 퇴직할 때까지 교편을 잡았다. 그는 이론물리학자이면서도 실험 물리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하며 학문이 진정으로 뿌리를 내리려면 이론과 실험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은퇴 이후에도 통계물리 월례 강연회 및 발표장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젊은 후학들의 발표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는 조-울렌벡 이론(Choh-Uhlenbeck Theory)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으며, 초창기 우리나라 물리학 교육과 토착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국내 최초의 1.5MeV 싸이클로트론 입자가속기 건조를 주도하는 등 40여 년간 교수, 한국물리학회장 및 한국과학기술원장 등을 역임하며 우수한 인재를 양성했으며 오늘날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토대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 통계물리학의 발전을 선도했다. 1973년 한국물리학회에 열 및 통계물리 분과를 설치했으며, 서강대 재직시 시행한 수요세미나는 우리나라 통계물리학을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국이 낳은 천재 핵물리학자 이휘소, 국내 기초과학 진흥에도 기여


이휘소 박사(1935~1977)는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 서울 용산에서 탄생, 1941년 경성사범학교 부속제1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부유한 친구의 집에 놀러가 일본 과학잡지인 '어린이 과학'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1947년 경기중학교로 진학했으나 중학교 4학년때 한국전쟁이 발발, 피난생활을 이어갔고, 검정고시와 입학시험을 치러 1952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수석 입학했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서구 대신동에 해당하는 지역의 가건물로 옮겨 와 있었는데, 서울대학교만 따로 있지 않고 '전시 연합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모든 대학교가 한 곳에 모인 상황에서 수업만 학교별로 따로 받도록 되어 있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한 학기 수업을 받은 후 이휘소 박사는 물리학에 큰 흥미를 느꼈고, 이후 수차례에 걸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의 전과를 시도했으나 당시 화학공학과에서 전과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학교 수업과는 별도로 독학으로 물리학을 공부하고는 있었지만, 수차례에 걸친 시도가 모두 실패로 끝나 큰 실망을 하고 있던 중에, 마침 한국전 참전 미군 장교 부인회의 후원을 받는 유학장학생에 선발되었다. 이에 그는 좋아하는 물리학을 실컷 공부하지 못하게 하는 서울대학교를 과감하게 박차고 나와 1955년 1월에 오하이오 주 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과에 편입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온 지 1년 반 만인 1956년 6월에 물리학과를 최우등(summa cum laude)으로 졸업하고, 학과장 등의 추천으로 피츠버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휘소는 피츠버그 대학교의 박사 학위 자격시험에서, 차점 합격자와 총점이 20점 이상 벌어지는 높은 점수로 수석 합격하고, 1958년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이미 피츠버그 대학교의 박사 진급을 앞두고 있었지만, 메슈코프는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며 그를 명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에이브러햄 클라인(Abraham Klein)에게 추천했다. 클라인은 이휘소 박사의 재능을 인정하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사 학위 자격시험인 예비시험을 면제받도록 해주었으며, TA 및 RA 장학금보다도 더 혜택이 좋은 해리슨 연구장학금(Harrison Fellowship)을 주선해주기까지 했다. 


클라인은 당시 서른 세 살의 젊은 교수였는데, 이휘소 박사는 클라인과 함께 공동 연구를 수행하면서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에 조금씩 접근해 나갔다. 1960년 11월에 물리학 박사(Doctor of Philosophy) 학위를 받았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1961년 가을, 이휘소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자연과학부의 연구회원이 되었고, 1962년 6월 초, 그는 국제 원자력 기구가 주최하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이론물리학 세미나(Seminar on Theoretical Physics)에 참석할 10인의 미국 대표단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의 이휘소는 젊은 연구자로서 미국 내에서 무시 못할 명성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단계에서는 아직은 어떤 큰 성과를 내지는 않았다. 그의 중요한 학문적 성과는 모두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휘소 박사는 1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중 60여 편만으로도 1만 회가 넘게 인용될 만큼 그의 연구성과는 학계에서 주목을 끌었다. 특히 그의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게이지 양자장론에서 재규격화 정립과 참입자의 탐색에 관한 연구이다.


핵의 베타 붕괴 같은 소립자의 약상호작용에 관한 페르미 이론은 1950년대 후반 공간반전 대칭의 깨짐이 알려져 큰 변혁을 가져왔다. 그 후 전자기작용과 약상호작용을 통합하려는 이론들이 생겨났지만 약작용과 관련되는 게이지장의 재규격화가 큰 걸림돌이었다.


이 박사는 게이지 대칭이라는 이론을 이용해 자연계의 네 가지 상호작용 가운데 전기적 상호작용과 약한 상호작용을 통합해 기술하려는 전기약작용 이론에서 문제가 되었던 재규격화의 해결책을 제시해 소립자 물리학의 표준모형을 확립했다. 그가 사망한 뒤 게이지이론은 표준이론이 되어 ‘전기’와 ‘자기’ 현상을 통합 설명하는 맥스웰 이론에 버금가는 물리학 이론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게이지 이론을 처음 주창한 이들은 1967년 와인버그, 살람, 글래쇼 등 3인이며 이들은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런데 그들의 이론이 전자기 현상과 약작용을 통합하는 전약 작용이라는 통합 이론으로 널리 사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박사의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논문이었다. 특히 살람은 와인버그보다 1년 늦은 1968년에 연구결과를 발표했으나, 이휘소가 강연에서 와인버그 이론과 동등한 자격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줌에 따라 노벨상을 공동 수상할 수 있었다. 때문에 노벨상 수상 당시 살람은 “이휘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는 수상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게이지 이론을 사용해 실제로 유한한 답이 나오는 계산이 가능하다는 논문을 발표한 이는 네덜란드의 이론물리학자 벨트만과 그의 지도를 받던 대학원생 토프트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논문의 연구 방향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그 논문에 대한 의구심을 잠재워 학자들의 주목을 받게 한 이 역시 이휘소 박사였다. 이런 인연으로 1999년 벨트만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토프트 역시 수상 소감에서 ‘이휘소 박사를 만났던 것은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었다’고 언급하며 고마워했다.


‘참(Charm) 입자’로 구성된 새로운 소립자의 이론적 예측을 한 것도 이휘소 박사의 큰 업적으로 꼽힌다. 이 박사는 1974년에 쓴 ‘참 입자들의 탐색’이란 논문을 통해 이들 입자를 찾아내는 방법과 성질 등을 예언했는데, 그로부터 몇 달 후 참 입자의 결합상태인 차모니움이란 새로운 소립자가 발견돼 물리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 논문은 고에너지 물리학계의 전설이 되었으며, 이후 이론적으로는 알려져 있으나 실험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현상을 탐구하는 풍조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휘소 박사는 외국 및 학계에서의 명성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기초과학 연구 진흥에도 매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한국과학원의 하계 물리학교 참여를 거부했지만, 그로부터 2년 후인 1974년 한국을 방문했다. AID 차관 자금에 의한 서울대학교 원조계획의 미국 측 심의위원 자격으로 귀국한 것이다.


국내 대학교육용 기자재를 구입하고 실험시설을 확충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이 원조계획은 1980년대 우리나라 대학원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한 그는 실험물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우리나라가 고에너지 국제공동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했다. 1972년부터 3년 동안은 재미 한국과학기술자협회 부회장을 지내면서 한국이 공업화하는 시기에 과학기술 분야에서 재미 한인 동포들의 참여를 유도하기도 했다.


40대에 접어들면서 그의 학문은 더욱 빛을 발했으며, 물리학자들 중에는 이휘소 박사의 노벨상 수상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갔다. 1971년 한국으로 보낸 편지에서 그해 노벨상이 입자물리학에 주어진 점을 지적하며 자신의 공적이 아직 많지 않아 연구에 더 주력하겠다고 밝힌 것을 보면 그 자신도 은근히 노벨상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가 그의 꿈이자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 기회를 날려 버렸다. 1977년 6월 16일 오후 1시 20분 경 그는 일리노이주 케와니 근처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페르미연구소의 하계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마침 휴일을 맞은 가족들과 함께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오던 대형 유조차의 타이어가 터지면서 중앙분리대를 넘어와 이 박사가 탄 승용차를 덮쳤다. 다행히 가족들은 경상에 그쳤으나 운전대를 잡았던 이 박사는 창틀에 머리를 부딪쳐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페르미연구소장이던 윌슨은 그의 장례식장에서 “우리 시대에 가장 위대한 학자를 잃었습니다”라는 말로 그를 추모했다.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APCTP)에서는 지난 2012년부터 이론물리학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남긴 이휘소 박사를 추모하기 위해 ‘벤자민리 석좌교수’ 프로그램을 매년 열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이휘소 박사의 이름을 딴 유일한 국내 학술기념행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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