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빚내서 연구 장비 구입하자 뿔난 아내, 지금은 ‘잘했다’합니다” 본문

한림원 사람들/회원

“빚내서 연구 장비 구입하자 뿔난 아내, 지금은 ‘잘했다’합니다”

과기한림원 2015. 8. 28. 08:58



[한림원이 만난 사람] 대한민국학술원상 수상 김세권 부경대 특임교수
취직 위해 들어간 대학서 연구의 즐거움 각성
하나하나 단계 밟아간 토종 박사, 결국 세계적인 해양생명공학자 이뤄
연구내용 총망라한 교과서 출판이 연구자로서 마지막 목표

25년 전,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젊은 연구자였던 김세권 부경대학교 특임교수는 호기롭게 결단을 내렸다. “내 돈으로라도 실험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마음껏 연구해봐야겠어.” 그간 모은 전 재산을 다 들이고도 모자라 사업하는 친구에게 빚까지 냈다. 40여종이 넘는 장비를 사기 위해 말 그대로 ‘억’소리 나는 돈을 썼다. 아내는 웃음을 잃었다. “미쳤군요.” 하루에도 몇 번씩 한숨을 쉬었다. 장비 구입을 도와주던 미국 교수도 김 교수가 자비로 장비를 산다는 걸 알고 나선 반응이 뜨악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나요?” 자기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입국심사에서 세관담당자는 김 교수를 장사꾼 취급했다. “돈 벌려고 사온 장비들이죠?” 무조건 관세를 징수해야겠다고 했다.

2015년 현재, 보름 후면 김세권 교수는 제60회 대한민국학술원상을 받는다.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인 성과를 내고 학문 발전에 공헌한 최고의 학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김 교수는 해양바이오 및 기능성 식품분야에서 400여편의 SCI논문, 130건의 특허, 57권의 전문서적 출간 등의 성과를 인정받았다. 상금은 5000만원. 그러나 사실 그때 그 장비로 진행한 연구를 통해 만들어낸 부가가치는 이미 수 만 배를 넘어선지 오래다. 해외 유수의 학술대회로부터 기조연설 초청을 받은 남편을 따라 전 세계를 누빈 아내는 이제 껄껄 웃으며 “그때 참 잘했다”는 말을 한다.

국내, 그것도 지방 국립대학교에서 학위를 모두 마친 토종박사가 대한민국학술원상을 받은 것은 김 교수가 최초다. 학술정보서비스기업 톰슨 로이터는 얼마 전 지난 10년간 논문이 많이 인용된 한국인 연구자 16명을 공개했는데, 그 중 부산 지역의 교수는 그가 유일했다. “연구에 투자한 것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그를 8월 초, 서울역에서 만났다. 



“연구자에게 시간은 생명…돈보다 연구에 매진할 타이밍이 더 중요했다”

김세권 교수의 고향은 경기도 안성이다. 어릴 적 제법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서울대 입시에 한 번 낙방하고 나서는 공부에 대한 자존감이 크게 떨어졌다. 마침 친척어른이 졸업 후 취직이 잘 될 거라며 신생학교였던 부산수산대학을 추천했는데 어릴 때 삽교천 외가댁에서 보던 서해안 갯벌의 신비로움이 생각나 덜컥 시험을 보고 입학했다. 정원 200명의 학교는 규모가 너무 작아 처음엔 실망했으나 갈매기가 날고 조개가 널려있는 바닷가 캠퍼스의 낭만에 금세 빠져들고 말았다. 

취직 생각에 일찌감치 군 생활을 마치고 2학년으로 복학하자 그를 눈여겨봤던 선배가 연구실에 들어오라고 권했다. 1970년대 중반, 당시 부산은 전기사정이 좋지 않아 갑자기 정전이 될 때가 많았는데 애써 진행하던 실험을 망치지 않도록 학생들이 2교대로 밤샘을 했다. 일요일도 없이, 밤낮 없이 실험하는 것에 지쳐갈 때쯤 회사 과장으로 있던 선배로부터 품질관리 담당 약사 자리가 비었으니 입사하라는 연락을 받고 취직했다. 

1년간의 회사생활은 매우 값진 시간이었다. 회사에서 역시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했는데, 실험실보다 더 단조로워 그제야 ‘연구가 혹시 내 천직일까’ 생각하게 됐다. 내심 그를 아까워하던 교수가 다시 그를 학교로 불렀고, 그는 석사에 이어 박사까지 국내에서 마치고 모교에 부임하게 됐다. 그때의 그는 “모교 교수로 일하는 행운을 얻었으니 더욱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해양생물에 대한 기초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시절, 해양생물자원을 활용하는 연구를 해보겠다며 ‘해양생화학전공연구실’을 만들었다.


- 당시 연구나 교육 환경은 어땠나.

“신설학과다 보니 연구 장비가 거의 없었다. 당연히 대학원생도 없을 때라 학부생 2명을 실험실에서 공부하도록 했지만 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인력은 나 혼자였다. 연구비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운 좋게 교육부에서 500만원의 연구비를 받았는데 실험장비가 없어서 연구시설이 갖추어진 다른 학과 교수의 실험실을 이용했다. 그 실험실 소속 대학원생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실험을 하지 않으면 연구결과보고서를 쓸 수 없는 상황인지라 대학원생들의 비위를 맞추어 가면서 시간 나는 대로 직접 실험을 했다. 학과교수도 3명밖에 없어서 전공이 아닌 과목도 가르쳐야 하니 마치 대학입시생처럼 공부해서 강의를 했다.”

- 연구에 대한 열망이 클 때라 더 힘들었겠다.

“연구시설이 잘 갖춰진 곳에서 연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좋은 기회도 있었지만 학과 사정에 따라 놓치기도 했다. 후에 과학재단에 해외 포스닥을 신청해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서 ‘한외여과막 반응기(membrane bioreactor)를 이용한 어류단백질의 기능성 개선’에 대해 연구하게 됐다. 미국에서 선진 연구 환경을 경험해보니 내가 하고자 하는 분야는 장비에 따라 연구 성과가 크게 좌우되는 것을 깨달았다. 장비구입비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빨리 연구에 매진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 귀국할 때 사비를 털어 장비를 샀다. 통장잔고를 바닥내고 빚까지 졌다. 아내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미국 교수는 그런 상황을 이해를 못 하더라.”

- 관세는 결국 어떻게 됐나.

“미국에서 구입한 40여종이 넘는 장비들이 이삿짐으로 왔는데 관세가 문제였다. 모든 실험 장비들이 포장된 채로 있다 보니 세관 담당자는 팔아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닌가 하여 무조건 관세를 징수하겠다고 했다. 아무리 이해를 구하고 설명해도 담당자는 관세를 내야한다고 주장하니 통장을 털고 빚까지 져 구입했던 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장고 끝에 담당과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절대 반출하지 않고 연구실에서 직접 활용하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장비를 실험실에 설치한 후 비로소 1년에 3개의 연구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1992년 처음으로 대학에도 특정연구과제를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갑자기 연구비 규모가 10배 이상 커지게 되었다. 1년에 몇 건씩 억대 프로젝트를 따냈다. 타이밍이 정말 절묘했다. 그 때 장비를 미리 구축해놓은 것이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잘한 일이었다.”

- 실험실이 잘 갖춰져서 대학원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겠다.

“내 연구실에 학과대학원생 70% 이상이 왔다. 당연히 연구 논문수도 꾸준히 증가됐다. 그러다보니 학과회의에서 다른 교수로부터 한 교수가 받을 수 있는 대학원 학생 수를 제안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충분히 다른 교수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외국유학생은 예외로 하자고 제의했다. 이후 스리랑카, 베트남, 인도, 중국, 터키, 인도네시아 등에서 유학생을 받았는데 이 친구들이 워낙 열심히 해서 우수한 학술지에 논문을 많이 발표했다. 국내 학생들도 유학생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한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어 전체적으로 내실이 다져졌다. 유학생들이 많으니 서로 간 영어실력이 급격히 발전해 주로 해외저널에 발표하게 됐다.”

- 교수로 임용된 제자들이 많다.

“교수로 있으며 석사 61명, 박사 32명을 배출했는데 이중 18명의 제자가 국내외 대학에서 교수로 임용돼 해양바이오 전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은 사람의 28%가 대학 교수가 된다고 한다. 학생들과 열심히 노력한 결과인 것 같아 매우 대견하고 뿌듯하다.”

- SCI논문 피인용 지수가 높은 비결은 무엇인가.

“우선 해양생물에서 새로운 기능성 물질을 찾아내어 구조를 밝히고 어떤 활성을 나타내는지를 확인하고 활성이 밝혀지면 어떻게 해서 활성을 나타내는지 메커니즘을 밝힌다. 메커니즘을 밝힌 논문은 비교적 우수한 국제 저널에 투고가 가능하고 인용지수도 높아질 뿐만 아니라 특허도 등록이 쉽게 이루어지므로 산업화에도 유리한 조건을 갖게 된다.”

- 실제로 기술사업화 성과를 많이 냈다. 

“세계 최초로 키토산 가수분해 효소를 이용, 키토산 올리고당을 연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또 분자량 크기에 따라 항암, 항산화, 항균과 같은 생리활성이 달라 목적에 맞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버려지는 대게 껍질에서 kg당 3만원인 키토산을 추출하고, 이것을 다시 kg당 15만원인 키토산 올리고당으로 바꾸는 기술이다. 해당 기술은 과기부로부터 신기술인증(KT마크)을 받았고 (주)키토라이프에 기술이전해 1000억대의 부가가치를 창출했다. 또 미이용 해양생물자원으로 개발한 기능성 화장품 소재를 개발해 (주)한국콜마에 3건의 기술이전을 했고, 항고혈압 기능성 펩타이드는 (주)영산홍어에, 성기능 개선 기능성 펩타이드는 (주)생명과학에 기술 이전했다.”




“20년 넘게 새벽 영어 공부…해양생명공학 교과서 펴내 마지막 공헌할 것”

해양생명공학분야 개척자로서 우수한 연구 성과를 낸 김세권 교수는 2004년부터 10년 간 해양수산부 해양바이오프로세스연구단장으로 미이용 해양생물 자원으로부터 새로운 기능성 소재를 개발하는 산업화 연구를 수행했다. 또 해양수산부 산하 한국해양과학기술진흥원의 초대이사로서 연구개발 사업의 정책수립 등을 진행하기도 했다. 연구자로서 연구관리자로서 행정가로서 최선을 다해 소임을 마친 그가 최근 몰두하고 있는 것은 집필 활동이다. 벌써 60권의 책을 냈는데, 그 중 25권이 국제 유명 출판사인 Wiley, Academic Press, Springer, CRC 등에서 낸 영어로 된 책이다. 1,512페이지에 달하는 분량도 놀랍지만 줄곧 국내에서 연구 활동을 해온 그가 논문도 아닌 교과서를 영어로 쓰고 있다는게 놀라웠다. 

- 현재는 책을 펴내는데 주력한다고 들었다.

“해양생명공학은 다학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다양한 해양학 분야를 알아야 하고, 최근에는 생물학적 탐구와 첨단기법까지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전문서적은 매우 부족하다. 세계 여러 나라에 해양생명공학과가 설치되어 있지만 해양생명공학 교재가 없다. 국제 학회에 가면 다들 교재출판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누가 나서는 사람이 없다. 할 수 없이 혼자서 ‘Textbook of Marine Biotechnology’를 집필 중에 있다. 영어로 처음 책을 낼 때는 출판사들의 심사가 까다로웠는데, 지금은 전세가 역전돼 출판사들로부터 책을 써달라는 요청이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온다. 물론 솔직한 심정은 연구를 더 열심히 해서 연구결과의 산업화에 보다 도전하고 싶은데 연구비 수혜가 전임교원으로 제한되어 있어 포기해야 하는 아쉬움이 많다. 그래도 책을 펴내는 것이 의미가 있고 내 연구결과를 남겨 후배들이 이어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사명감을 갖고 하고 있다. 현재 해양생명공학 백과사전 (Encyclopedia of Marine Biotechnology)이 Vol. Ⅰ, Ⅱ, Ⅲ 으로 내년 말에 출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 국내에서 생활을 오래 했는데 영어로 책 쓰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나.

“당연히 영어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30년 전 처음 국제학술대회에서 영어로 발표할 때 긴장감을 이기고자 술을 마시고 연단에 섰는데 발표가 잘 됐다. 그 후 음주발표 습관을 버리지 못하다가 결국 사달이 났다. 마신 술이 잘못 됐는지 미국학회 초청발표 중에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부들부들 떤 적이 있다. 그 때 스스로 ‘나의 연구는 세계 최고고, 내 연구는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왜 긴장을 해야 하나’ 생각했다. 이후 방법을 바꿨고 20년이 넘게 매일 새벽 5시부터 2시간씩 방송을 보며 영어공부를 한다. 오늘 새벽에도 했다. 언어는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 학벌과 스펙에 연연하는 사회에서 교수님이 하나하나 이뤄낸 성과가 감동적이다. 후배들에게도 조언을 한다면.
   
“나 역시 괜스레 위축될 때도 있었고, 쉽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연구 성과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는 분야다. 가치 있는 논문을 발표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비전이 있다. 특히 해양생명공학은 매우 가능성 있는 분야다. 현재까지 천연물로부터 인체에 대한 안전성이 높고 효능이 우수한 생물소재 및 의약소재 등이 다수 개발되어 왔으나 대부분 육상의 동·식물체, 곰팡이와 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을 대상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육상생물자원에서의 신소재나 신물질 개발은 그 대상이 점차 줄어들어 한계에 도달하였다. 때문에 최근 선진국들을 비롯하여 바다와 인접한 해양 국가들은 생물소재의 개발대상을 육상생물자원에서 해양생물자원으로 점차 이전하는 추세다. 해양생물은 그 종류가 다양하여 지구 전체 생물 중 약 80%가 바다에 서식하고 있으며, 90% 이상이 미이용자원이다. 또한 이 분야의 관련 연구자가 매우 적은 실정이므로 젊은 후배들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도전한다면 미래는 매우 밝을 것으로 본다.”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